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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5월 17, 2026

노숙

노숙 김사인 신문지 같은 옷가지를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작은 짐승

  작은 짐승 신석정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 소나무 / 참나무 /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허브 도둑

  허브 도둑 장옥관 “난초 도둑” 이란 소설도 있지만 정말 허브를 도둑맞는 일이 있었습니다. 새들새들한 게 안쓰러워 거름 주고 햇볕도 주려 복도 끝 창가에 내놓았지요. 그런데 잠시...

누더기

  누더기 정호승 당신도 속초 바닷가를 혼자 헤맨 적이 있을 것이다 바다로 가지 않고 노천횟집 지붕 위를 맴도는 갈매기들과 하염없이 놀다가 저녁이 찾아오기도 전에 여관에 들어 벽에 옷을 걸어놓은 적이 있을...

새는 날아가고

새는 날아가고 나희덕 새가 심장을 물고 날아갔어 창밖은 고요해 그래도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접시를 앞에 두고 거기 놓인 사과를 베어 물었지 사과는 조금 전까지 붉게 두근거렸어 사과는 접시의 심장이었을까 사과 씨는 사과의...

님 -김수환 추기경님 영전에- 어디인지 모르고 저희들 여기 이리 서 있어요 동녘 하늘 밝아오지만 가는 길 아직도 몰라 님이여 우리 이렇게 아직도 서성입니다. 부디 손짓해 주세요 손수건을 접고 이제 걷기 시작할래요 바람이 차요 이젠 쉬세요. 김지하 모심     김지하 시인은 1973년 봄...

봉지밥

봉지밥 이병률  봉지밥을 싸던 시절이 있었지요  담을 데가 없던 시절이지요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넣고  가슴팍에도 품었지만  어떻게든 식는 밥이었지요  남몰래 먹느라 까실했으나  잘 뭉쳐 당당히 먹으면...

늙은 비의 노래

늙은 비의 노래 마종기 나이 들면 사는 게 쉬워지는 줄 알았는데 찬비 내리는 낮은 하늘이 나를 적시고 한기에 떠는 나뭇잎 되어 나를 흔드네. 여기가 희미한 지평의 어디쯤일까. 사선으로 내리는 비...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