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C
Montreal
일요일, 5월 17, 2026

사물의 꿈 1

사물의 꿈 1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이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허물 벗는 소리

허물 벗는 소리 박이도 새벽 늪가에 앉아보니,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빛의 그림자 물안개가 숨을 쉬고 일어서는 몸짓 이술 맺힌 나팔꽃이 벙그는 그 순간의 희열이 나팔소리처럼 허공에 퍼진다 허물 벗는 물잠자리의 작업 길고 긴 침묵의 소리 살아 숨쉬는 늪가에선 눈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가을 날

가을 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집과 길

집과 길 김명인 집 밖에 만 리를 두고 천 리 안쪽에서 그 집을 그리워한다 이 망원(望遠)은 아침부터 불볕에 이끌려 가는 거대한 초록 짐승 떼의 이동을 바라보면서 눈 시린 햇살 아래...

동거

동거 생각난다 신당동 중앙시장 팥 적은 붕어빵과 곱창으로 넘긴 그해 겨울의 저녁과 아침. 시골 여상 출신의 그대가 졸음 쏟아지는 미싱대에서 주판알 대신 올리고 내리던 기래빠시...

자네트가 아픈 날 2

자네트가 아픈 날 2   박상순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이제는 다 틀어져버린 솜씨로, 틀어진 항아리를 만든다. 내가 주둥이를 최대한 작게 마감할 동안 그녀는 약을...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최영미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작은 짐승

작은 짐승 신석정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 소나무 / 참나무 /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황야의 건달

황야의 건달 고영 어쩌다가, 어쩌다가 몇 달에 한 번꼴로 들어가는 집 대문이 높다 용케 잊지않고 찾아온 것이 대견스럽다는 듯 쇠줄에 묶인 진돗개조차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