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들을 쓰다
별빛들을 쓰다
오태환
필경사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 글씨를 쓰듯 이 별빛들을 쓰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해지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흑란...
갈대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자반 고등어
자반 고등어
이성목
오래 소장하고 싶다면
이 책은 표지만 읽어야 한다
첫 쪽을 쓰다가 고스란히 백지로 남겨둔
이 육신을 눈으로만 읽어야 한다
이면과 내지가 한 몸인 그를
몇 장 넘겨보기도 했지만
뒤집을...
새의 습성
새의 습성
윤준경
새를 동경한 것은 막연한 욕심이었을 뿐
날 수 있는 힘의 논리를
연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그의 가벼움이 부러웠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부러웠을 뿐
나르는 연습조차...
칸나꽃 분서(焚書)
칸나꽃 분서(焚書)
신미나
절명을 꿈꾼들 저 꽃 같이는 심장을 내걸 수 없었네
계절은 매번 色 다른 변절을 꿈꾸어 왔으므로
이제 나를 거쳐 간 연애는 미신이 되었다
돌아본들 유산 후에...
그 집 앞 능소화
그 집 앞 능소화
이현승
1.
이를테면 제 집 앞뜰에 능소화를 심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여름날에, 우리는 후두둑 지는 소나기를 피해 어느 집 담장 아래서 다리쉼을...
밥상 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밥상 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백상웅
우리 가족의 밥상은 반찬이 적을 때도
첩첩산중.
낫을 휘두르고 괭이질을 해야 건널 수 있었지.
밥상의 가운데는 모닥불을 피워 냄비를 걸었던 흔적,
우리가 둘러앉아 가죽을...
능소화
능소화
문성해
담장이건 죽은 나무건 가리지 않고 머리를 올리고야 만다
목 아래가 다 잘린 돼지 머리도 처음에는 저처럼 힘줄이 너덜거렸을 터
한 번도 아랫도리로 서본 적 없는 꽃들이
죽은...
바뀐 신발
바뀐 신발
천종숙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닳아있는 신발 뒤축에서
타인의 길이 얽혔다
똑같은 길을 놓고 누가
내 길을...
나비 그림에 쓰다
나비 그림에 쓰다
허영숙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다 꽃길이라 믿었던 시절 득음한 꽃들의 아우성에 나도 한 때 꽃을 사모하였다 꽃을 사모하니 저절로 날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