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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6월 11, 2026

모자 이야기

  모자 이야기 남진우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내...

겨울 산행

겨울 산행   강미영   산아, 너는 외로울 줄을 모르는가 그 봄엔 철쭉이며 오디 앵두 지천이더니 이 겨울엔 눈꽃이 눈꽃이 피었다 오래 쓸쓸하여 차라리 쓸쓸함을 잊어버린 너의 겨울 자리 더러 남아 네...

라디오와 미싱

라디오와 미싱 박종명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을 딛는 순간 사람들이 동네전파상에 걸린 TV 앞에 몰려와 하, 탄성을 질렀다 그 때는 집집마다 라디오와 미싱을 서로 가깝게 붙여...

손님

손님 백무산 내가 사는 산에 기댄 집, 눈 내린 아침 뒷마당에 주먹만한 발자국들 여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다 발자국은 산에서 내려왔다, 간혹 한밤중 산을 찢는 노루의 비명을 삼킨 짐승일까 내가 잠든 방 봉창...

어느날

어느날 박종명 마지막이란 말 무심코 툭 던지면 탈탈탈 무성자음이 낯선 것들과 부딪는 소리 무겁다 막다른 골목에서 발자국 몇 개 집어내려는데 종일 쏟아진 흙비 내가 버린 무성자음을 다 쓸고 어디론가 흐른다 이제껏 살면서 못다 푼 한 마디가 무엇일까. 자음과 모음을...

흐린날 미사일

흐린날 미사일 김영승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록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상하로 발을 쳤고 그 휘장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새의 부족

새의 부족 손택수 새들의 노래로 지도를 만드는 부족이 있었다지 새들의 방언에 따라 국경선과 도계를 긋고 살았다는 사라진 부족의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더라 아마도 새들은 모든 뻣뻣한 경계선을 수시로 넘나들었을 거야 수백...

목마른 우물의 날들

목마른 우물의 날들 이안 그날 당신은 비보다 꼭 한 걸음 늦었다 그래서 꼭 그만큼 걷지 못한 빨래가 비를 맞고 있었다 꼭 그만큼 시간이 늦어져서 꼭 그만큼의 생이 뒷걸음질로 밀리고 밀렸다 한치도 어긋하지 않는...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가을 오후

  가을 오후 도종환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를 던지며 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