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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18, 2026

어느날

어느날 박종명 마지막이란 말 무심코 툭 던지면 탈탈탈 무성자음이 낯선 것들과 부딪는 소리 무겁다 막다른 골목에서 발자국 몇 개 집어내려는데 종일 쏟아진 흙비 내가 버린 무성자음을 다 쓸고 어디론가 흐른다 이제껏 살면서 못다 푼 한 마디가 무엇일까. 자음과 모음을...

흐린날 미사일

흐린날 미사일 김영승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록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상하로 발을 쳤고 그 휘장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새의 부족

새의 부족 손택수 새들의 노래로 지도를 만드는 부족이 있었다지 새들의 방언에 따라 국경선과 도계를 긋고 살았다는 사라진 부족의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더라 아마도 새들은 모든 뻣뻣한 경계선을 수시로 넘나들었을 거야 수백...

목마른 우물의 날들

목마른 우물의 날들 이안 그날 당신은 비보다 꼭 한 걸음 늦었다 그래서 꼭 그만큼 걷지 못한 빨래가 비를 맞고 있었다 꼭 그만큼 시간이 늦어져서 꼭 그만큼의 생이 뒷걸음질로 밀리고 밀렸다 한치도 어긋하지 않는...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가을 오후

  가을 오후 도종환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를 던지며 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별빛들을 쓰다

별빛들을 쓰다 오태환 필경사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 글씨를 쓰듯 이 별빛들을 쓰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해지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흑란...

갈대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자반 고등어

  자반 고등어 이성목 오래 소장하고 싶다면 이 책은 표지만 읽어야 한다 첫 쪽을 쓰다가 고스란히 백지로 남겨둔 이 육신을 눈으로만 읽어야 한다 이면과 내지가 한 몸인 그를 몇 장 넘겨보기도 했지만 뒤집을...

새의 습성

  새의 습성 윤준경 새를 동경한 것은 막연한 욕심이었을 뿐 날 수 있는 힘의 논리를 연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그의 가벼움이 부러웠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부러웠을 뿐 나르는 연습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