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둑놈의 꽃아 – 고영민
이, 도둑놈의 꽃아
고영민
여름이 지나자 봉숭아 줄기 밑
큼지막한 자루가 생겼다
어느 집 젊은 과부라도 보쌈한 듯
온통 안주머니가 불알처럼 탱탱하다
자루를 움펴쥔 손목에 힘이 들어가 있다
그 불알 같기도...
자전거 탄 부부의 풍경 – 안상인
자전거 탄 부부의 풍경
안상인
자전거를 앞뒤로
사이좋게 타고
가정이란 안장 위에 앉아
함께했던 당신과 내 삶은
바퀴 닮은 둥근 성격으로
둥글게 굴러왔고
둥근시간의 굴레 속에
구겨진 삶의 애환을
평탄하게 직선으로 펴가면서
동고동락 길이사랑으로
바쁘게 달려왔소
난...
연못의 나라 – 박진성
연못의 나라
박진성
온 몸이 눈알이어서 네가 바라만 봐도 사랑이다 연꽃은 내가 키운 속눈썹이니 물고기들 죄다 열반이다
비 내리면 타닥타닥 공중으로 길을 만드니 쏟아지는...
단추를 달다가 – 한혜영
단추를 달다가
한혜영
나뭇잎 하나가 까딱이 없는
말간 대낮에 단추를 달다가
농담처럼 부음을 듣습니다
기가 막혀
앞섶에 바늘을 꽂고 고개 천천히
길어 올리니 삼베옷을 걸친
누런 허공이 징소리를 징징 내며
목을...
배롱나무 꽃그늘
배롱나무 꽃그늘
윤은경
불현듯 열릴 것이네
석 달 열홀 기다려 아주 잠깐 열렸던, 다시는 열고 들어갈 길 없는 문, 그늘은 아무런 말이 없지만, 어쩌나 염천의...
종이봉투에 갇힌 길
종이봉투에 갇힌 길
김 종 성
낙타는 물 냄새로 길을 찾아가고
연어는 모태 양수 냄새로 길을 찾아가는데
검지로 찍어 길을 가다 외길에서 방향을 잃었다
왼손가락으로...
함박나무 그늘 아래서 – 김영준
함박나무 그늘 아래서
김영준
함박나무 꽃 그늘에 앉아본 적이 있는지
그 그늘의 한 소절에 기대어
익숙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는지
그 어느 때던가
함박나무는 마약 같은 이름을 지녔다고...
데미안 – 윤성학
데미안
윤성학
시간은 알을 깨고 나온다
가스레인지 모서리에 계란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을 깨 밖으로 나옸다
시간은 자신이 낳은 알을 쪼고 있었다
琢琢
계란이 가장 맛있는 프라이로 되는...
행복한 산책 – 노혜경
행복한 산책
노혜경
한밤중 숲으로 난 작은 길을
난 걸어갔네
내 뼈에서
살점들이 잎사귀처럼
지는 소리를 들었네
무엇이 남았는지는 모르지
아직도 뛰는 심장소리 들리지만
난 한없이 걸어 여기
너무, 너무 와 버렸으므로
펄럭이는...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