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의 시 – 문성해
눈사람이 홀로 밤을 맞고 있다
저런 눈사람으로 골목에 나앉아 있어 본 적 있는가
세상의 집이란 집은
모두 제 가족을 끌어안고
도무지 모르는 빛으로 동그랗게 불 밝히고
내겐 더 이상...
사유하는 텔레비전 – 우대식
우리 집 뒷산에 누군가 가전제품을 버리기 시작하면서 텔레비전이 무려 열 대 가까이 버려졌다. 어떤 놈은 모로 처박히고 어떤 놈은 나무 둥치에 버젖이 걸터앉아 있기도...
오래된 일기 (故 김근태 고문님 영전에 바침) – 강미영
나는 그를 모른다
왜 그가 붙들려 가는지
1990년 5월14일자 한겨례 신문 1면의 김근태 씨
수 십 아니 수 백의 험악한 장정들에 둘러싸여 낚아 채여서
개돼지처럼 그가 또 도살장으로...
다시 태어나 꽃으로
그리웠어요
고향의 밤하늘이
머리위로 날리던 풀내음이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어머니의 웃음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의 체온이
모진 운명과
힘없는 나라란 굴레에서
어느 곳에도 안식하지 못한 채...
지심도 동백 – 이동훈
동백꽃 보러 지심도에 갔다가
동백 잎사귀만 들고 나왔다
그 푸름이 탐이 나서 골방 문에 붙여 놓으니
잎자루가 몸통이 되고 잎맥이 가지가 되어
온전히 동백 한 그루가 되었다
동백은 좀체...
폭설 –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몬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물소뿔을 불다 – 이선이
물소뿔을 불다
이선이
티벳을 가야겠다는
손금 같은 사연 담은 엽서 한 장
물끄러미 내다보는
오동나무 잎새 사이로
물소 한 마리 걸어나왔다
유적지 가을하늘을 돌아나가는 바람소리 들릴 듯한 눈망울이
멀뚱하다
저 물소와 함께...
여우비 – 류기봉
여우비
류기봉
채마밭에 알타리무꽃이 진다
아버지의 손등으로 떨어지는
가을 햇살
내가 여주 은모래 강가에서 만나 눈시울 젖던
어둠 속을 뛰쳐나온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자 내 목숨이 흔들린다
밭두렁에 고꾸라진 땀에 젖는
농부의 어깨...
하루의 가슴 – 김어준
하루의 가슴
김어준
잃어버린 시간들
하늘을 가득 품은 숨소리를
푸르게 채색하고 있다.
난
피곤한 자색 유혹을 떨치고
하늘을 좇아
시간을 오르려한다.
그리고 걷는다 뒤뚱뒤뚱
늦가을녘의 허수아비마냥
바람에 기대어.
허나 외치리라,
“난 쫓아가는 거야
너처럼 기다리는 게 아냐.”
바람은 동그란...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 김정란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김정란
네 망설임이 먼 강물소리처럼 건네왔다
네 참음도
네가 겸손하게
삶의 번잡함 쪽으로 돌아서서 모르는 체하는 그리움도
가을바람 불고 석양녘 천사들이 네 이마에
가만히 올려놓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