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에 흰 눈이 내리네 – 박철
세시에 흰 눈이 내리네
박철
흰 눈이 내린다
마당 가득 흰 눈이 내린다
누군 히말라야에 가서 초라한 너를 발견하였다는데
네시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서는 길
차마 흰 눈 위에 발을...
국수와 어머니 – 이현숙
국수와 어머니
이현숙
한 달에 두어 번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식품점을 간다
마른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물건을 고르신다
허기져 보이는 어머니의 하얀 등이 안쓰러워
들어선 국숫집
긴 국숫발만큼이나 먼 길을 달려온 어머니와
마주...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 – 김경인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
김경인
너는 나를 뱉어낸다
다정하게, 아름답고 우아한 칼질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는 채
무엇을 말하고 싶지 않은지 모르는 채
어떤 의심도 없이 또박또박 나를 잘라내는
너의...
국화차를 달이며 – 문성해
국화 우러난 물을 마시고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나는 앞으로도 도저히 이런 맛과 향기의
꽃처럼은 아니 될 것 같고
또 동구 밖 젖어드는 어둠 향해
저리 컴컴히 짖는 개도...
슬픈 부도 浮屠 – 염창권
세월을 견디는 몸짓으로
침묵만한 것이 없음을 알겠다
연꽃 무늬 위에 커다란 마침표로 앉아 있는 부도 한 점
나뭇잎들은 떨어져 쌓인 후
얼마나 빨리 부패의 길을 건너갔던가
사람들은 또 얼마나...
그들이 처음 왔을 때 – 마르틴 니뮐러
그들이 처음 왔을 때
마르틴 니묄러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데칼코마니 – 최금진
데칼코마니
-새장-
최금진
나는 거울을 내려놓는다
당신은 털 빠진 목을 내밀어 새장 밖을 내다본다
손을 넣어 당신의 긴 머리카락을 벗겨준다
깃털이 졸음처럼 쏟아져내린다
나는 당신과 닮은 새 한 마리를 풀어 놓는다
잠에서...
가을예언 – 김백겸
가을 예언
김백겸
낮잠을 자는 인생의 오후에 까치가 몰려와 아우성을 치는군요
창 밖에 단풍나무 잎사귀들이 자욱히 떨어졌습니다.
하늘에 양떼구름들이 동에서 서로 은하수처럼 뻗어있고요
바람은 목자의 지팡이를 지나 초원을 가로지르고...
공광규 – 되돌아보는 저녁
되돌아보는 저녁
공광규
자동차에서 내려 걷는 시골길
그동안 너무 빨리 오느라
극락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디서 읽었던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잠시 쉰다고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
발들을 스치는 메뚜기와 개구리들
흔들리는 풀잎과 여린 꽃들
햇볕에...
야생사과 – 나희덕
야생사과
나희덕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 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