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이병률
이 좁은 마당으로는 다 받아낼 수 없는 봄이 내려앉고 있건만 대문 옆에 놓인 커다란 페인트 통은 가득 물을 담고 있다 일부러 모른 척했던 통이다
한겨울 아침이면 얼어 있다가 어떤 날은 멀거니 녹았다가 또 어떤 날은 다시 얼어버리고 만 통 안의 물이다 지난 가을 칠을 했으나 무엇이 불만인지 벗겨지고 일어나는 페인트가 담겼던 통이다
물은 증발되어서도 멀리 가지 못하는 공기인 척하다가 다시 비나 눈의 입자로 날아와 넘치도록 몸을 채우고 몸을 넓혔을 그리하여 여태 물이 가득한 통이다
통을 비울까 하여 들어보지만 가뿐히 들리지 않는 통이다 어색하게나마 달과 별을 담았던 통이라 다 비워버린다 해도 우물쭈물 통은 언제 그랬냐 싶게 물을 담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아예 뒤집어놓지 않으면 슬픔의 질통이 마를까봐 이 지경으로 담고 담는 거라면서 내 깊은 불출의 골병을 아는 체하려 들 것이다 일부러 모른 척해야 할 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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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정신적 외상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워 모른척하려고 한다. 통은 시인의 내면이고 상처는 깊어서 쉽게 들어내지 못하고 늘 다시 고인다. 곁에 있는 사람도 힘겹게 모른척 해야 할 일이 있듯이 스스로도 모른척 오래 곁에 두고 있어야 할 경우가 있다. 끝내 비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업보인지 인연인지 독자는 알 길이 없지만 그 무게로 인해 던져진 화두 삼아 저마다의 상처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이병률 시인은 ‘시힘’의 동인이고 제 1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당신이 아예 뒤집어놓지 않으면 슬픔의 질통이 마를까봐 이 지경으로 담고 담는 거라면서 내 깊은 불출의 골병을 아는 체하려 들 것이다 일부러 모른 척해야 할 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