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류시화

꽃눈 틔워 겨울의 종지부를 찍는 산수유 아래서
애인아, 슬픔을 겨우 끝맺자
비탈밭 이랑마다 새겨진 우리 부주의한 발자국을 덮자
아이 낳을 수 없어 모란을 낳던
고독한 사랑 마침표를 찍자
잠깐 봄을 폐쇄 시키자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사랑이 끝난 것과 관계가 끝난 것의 차이는 무었일까. 그 간극에 남은 것은 상처이고 상처가 꽃이되면 시가 피어나나보다. 그것이 전생에서 이어진 이승의 업보라도 할수없이.
류시화 시인은 1980 한국일보에 ‘아침’이란 시로 등단했고, 2012년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