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한 시계

 

송종규

 

천천히 원을 그리며 커다란 시계 위를 걸어갔다 시간은 어차피 모든 사건을 관통해 가는 것 시간은 어차피 그 시절 그 미루나무 위에 머물고 있는 것

 

창 밖에서 겨울이 첨벙첨벙 긴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수수꽃다리는 캄캄하게 저물었다 불행이 대수롭지 않게 어슬렁거리는 길목

 

막차는 끊겼다 내 안에는 안개가 자욱해서 생각이 콩나물처럼 자라났는데 미어질 듯한 둑이 겹겹이었는데

 

발바닥이 다 닳은 열두 시가 느린 팽이처럼 굴러갔다

 

한 번도 기록된 적 없는 사람의 전 생애가 방금 별빛을 통과해 갔다, 커다란 시계가 천천히 원을 그리며 걷고 있었다 반짝이는 미루나무, 수많은 잎사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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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원더랜드에서 시계토끼를 따라가면서 빠르게 흩어지는 풍경이 이 시와 같았을까…어쩌면 우리는 모두 꿈을 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라고 쓰지만 이런 표현은 사실 진부하다.  이렇게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것 같은 한 세월에 빗기며 시인은 천천히 스스로의 생을 소묘하고 있나 보다. 그리고 그 묘사는 아름답고 쓸쓸하다. 송종규 시인은 1989년 ‘심상’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