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
정호승 시인의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시집 속에 있는 시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 갑자기 맥이 놓이고 아스라한 먼 곳을 바라보는 느낌이 듭니다. 세상을 용서하고 세상을 품으며 시인은 이렇게 크고 깊어지는가 봅니다. 우리 생에서 ‘절벽을 휘감아 돌 때’는 어느 지점쯤인지 알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