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 – 김경인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

김경인

너는 나를 뱉어낸다

다정하게, 아름답고 우아한 칼질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는 채

무엇을 말하고 싶지 않은지 모르는 채

어떤 의심도 없이 또박또박 나를 잘라내는

너의 아름다운 입술을 바라보며

나는 한껏 비루한 사람이 되어

아름다운 저녁 속으로 흩어진다

푸르고 차가운 하늘에 흐릿하게 별이 떠오르듯이

내가 너의 문장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글자로 돋아나듯이

귀는 자꾸 자라나 얼굴을 덮는다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에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르자

나는 나로부터 흘러나와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열리지 않는 이중의 창문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함부로 살해되는 모음과 자음처럼

아무도 죽어가지 않는 저녁에

침묵의 벼랑에서 불현듯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처럼

멸종된 이국어처럼

나는 죽어간다, 이상하도록 아름다운 이 저녁에

휴지통에 던져진 폐휴지처럼 살기로 하자,

네가 내게 던진 글자들이 툭툭 떨어졌다

상한 등껍질에서 고름이 흘러내렸다

네가 뱉어낸 글자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자

그렇고 그런 사람과 그저 그런 사람 사이에서

네 개의 다리가 돋아났다

개라고 부르자 개가 된

그림자가 컹컹, 팽개쳐진 나를 물고 뒷걸음질쳤다.

신문 사회면에 가끔씩 배우자나 애인을 살해했다는 기사를 본다. 육체적 가해만이 아니고 말로서 가까운 사람을 학대한다면…. 그 당사자는 개처럼 물어 뜯을까 아니면 그냥 뒷걸음질 칠까? 잔인한 인과관계를 헤집어놓은 시 한편 읽다가 소름이 돋는다.

김경인 시인은 2001 문예중앙으로 등단했고, 이 시는 2011년 ‘올해의 좋은 시’에서 올해의 신작시를 받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