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한연희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얼어붙은 , 누군가와 마주 잡은 손의 온기,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서 누운 , 쟁반 가득 쌓인 귤껍질들이 말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은 창을 열고 나를 눅눅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이끼처럼 자꾸 안에 자라는 냄새들이, 알갱이처럼 똑똑 씹히는 말들이 혓바닥에서 미끄러진다 곰이 위에 누워 있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곰이, 수박을 우걱우걱 먹어치우던 곰이 나를 쳐다본다 곰에게서 범벅의 수박물이 떨어진다 여기가 동물원이 아니라 방이라는 것을 알아갈 때쯤, 나는 혼자남아 8월을 벗어난다

그러니까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차가운 방바닥에 눕는 것을 좋아한다 피가 나도록 긁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들이 땀띠처럼 늘어난다 그러니까 나는 여름을 죽도록 좋아한다

햇빛이 끈질기게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잎사귀의 뒷면과 그늘 사이를 벌려놓는다 먹다 남긴 수박껍질에 초파리가 꼬인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림자를 내쫓는 중이다 쌓인 빨래더미 위에, 식은 밥그릇 위에 고요가 내려앉는다

그러나 의지와 상관없이 종아리에 털들이 자라나는 ,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는 , 화분의 상추들이 맹렬하게 죽어가는 여름은 내내 지켜보고 있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쏟아지는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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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희 시인은 2016창작과 비평 4편의 시로 신인상을 받았다. 시를 읽다 보면, 참으로 사소한 것들이 스멀 스멀 존재의 틈새에 자리 잡는 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조명을 받을 때처럼 그렇게 주목을 받으면, 사소한 것들이 시어가 있다고 말해 준다. 시는 마치 카메라가 음악도, 소리도 없이 장면을 잡아서 보여주는것처럼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