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이 시를 읽다 문득 디즈니 만화영화 ‘신델렐라’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서둘러 왕궁에서 빠져나오느라 이제는 누더기가 된 옷차림으로 나머지 구두 한짝을 들고는 그녀가 한 말은 ‘Thank you, Thank you for everything.’ 그 난리를 치고 참가한 잠깐의 무도회를 끝내고 불평 대신 감사하다는 독백은 착한 심성을 가지 사람이라서 가능하다. 박경리 소설 ‘토지’ 1권의 마지막 구절도 그렇다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한강 시인도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