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린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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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도 이제는 자꾸 버리는 연습을 하나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서는 불교의 기운이 배어 나온다. 태어나 머물다 스러지는 모든 생명들이가여워지기 시작하는 나이, 내 한 세상도 버거운데 조상의 기억까지 짊어지고 가기에 너무 힘겨워 그는 자꾸 버리고자 한다. 그렇게 버리고 나서 진정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시의 늘어지는 행간과 함께.
나희덕 시인은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