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의 고고학

 

김백겸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는 문장처럼 말씀과 사물이 한 몸이었던 행복한 시대의 말이 있었다

에덴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던져진 말들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담의 몸처럼 썩고 부서지는 낙엽의 운명이 되었다

말들이 인간의 의식에서 태어났으나 대양으로 흐르는 시간의 강에 뜬 물살의 거품이었다

말들은 심연으로부터 솟구친 바위 같은 세계 풍경에 걸리며 인간 의식에 굴곡과 무늬를 만들어냈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회교 사원처럼

사각형과 원이 중첩된 티베트 만다라처럼

말과 말이 결승문자처럼 얽힌 만화경이 문명이었다

말의 역사 속에서 상징의 피라미드, 은유의 크레타 미궁, 이미지의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졌다가 무너졌다

인간의 생각들이 말의 요람에서 태어나 말들의 무덤에서 죽었다

제도와 법률과 화폐와 인간이 프로그램한 모든 도구들이 부장품처럼 묻혔다

인류의 의식은 흙의 잠 속에서 도서관의 책들과 박물관의 미라 같은 말의 꿈을 꾼다

죽은 생각들이 진시황의 병마용처럼 묻혀 드라큘라의 수혈 같은 재생의 시간을 갈구한다

나는 독자들을 비경(秘境)으로 안내하는 헤르메스처럼 지도와 랜턴을 준비해서 캄캄한 흙의 시간으로 내려가 문명의 모든 기억을 들여다본다

————————————————————————————————————————————————————–

태초에 ‘빛’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빛의 존재를 허락하는 ‘말’이 먼저였다고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언어 능력을 최고의 자리에 놓는 행위이다. 그래서 시인은 모든 문명의 정수가 바로 말과 함께 이어져온 것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을 갖는다. 지나간 것을 돌아볼 수 있는 능력, 말이 지나온 길을 찾아 시를 쓴다. 김백겸 시인은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