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둑놈의 꽃아
고영민
여름이 지나자 봉숭아 줄기 밑
큼지막한 자루가 생겼다
어느 집 젊은 과부라도 보쌈한 듯
온통 안주머니가 불알처럼 탱탱하다
자루를 움펴쥔 손목에 힘이 들어가 있다
그 불알 같기도 하고 젖통 같기도 한
주머니를 살짝 손으로 건드리니
에그머니나, 그 속에 몸이 단 과부 대신
검은 씨앗들이 튕겨졌다
다음해 여름, 키 낮은 담 밑에는
유난히 눈동자가 검은 처녀들이
한나절 담 밑에 턱을 고인 채
긴 치맛말기를 씹으며 첫사랑를 기다렸다
그 손톱이, 마음이 산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줌을 누던 나는 얼른 바지 속에 나를 숨겼다
마음이 간단없이 울렁거렸다
봉숭아는 그 여름 내내 시집도 안 간
처녀들만 골라서 보쌈을 했구나
에이구, 이 도둑놈의 꽃아!
내 사랑을 다오
슬쩍 다가가 자루 주머니 하나를
툭, 터뜨린다
프로이드가 이 시를 봤으면 잘 키워놓은 제자가 하나 설을 풀고 있는 줄 알겠다. 해를 두고 봉숭아꽃을 살피는시인의 상상력이 민망한데도 性은 마야고 곧 생명이라고 했던 평론가 ‘김현’의 말이 떠오른다. 그 부분은 아름다움을 탐색하고 건드리고 울렁이는 열정이 아름다와서 모른척 하기로하자. 고영민 시인은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