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설기(降雪期)
김광협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프로스트’씨도 이제는 말을 몰고 돌아가버리었다.
밤은 숲의 어린 가지에 내려온 흰 깁을 빨아 먹는다.
흰 깁은 밤의 머리를 싸맨다.
설레이던 바람도 잠을 청하는 시간, 나는 엿듣는다.
눈이 숲의 어린 손목을 잡아 흔드는 것을,
숲의 깡마른 볼에 입맞추는 것을,
저 잔잔하게 흐르는 애정의 일월을,
캄캄한 오밤의 푸른 박명薄明을,
내 아가의 무량無量의 목숨을 엇듣는다.
뭇 영아들이 등을 키어들고 바자니는 소리를,
씩씩거리며 어디엔가 매달려 젖 빠는 소리를,
나는 엿듣는다.
숲 가에서 나는 너의 두개의 유치乳齒를 기억한다.
너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너의 다수운 입김이 아침의 이슬로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생명의 빛이 너의 눈동자에 가득차 있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손을 내저어 대기를 흔들었음을 기억한다.
비록 부둥켜 안아 너의 행보를 연습시키었을지라도
너의 발을 디뎌 대기를 느끼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언어는 무無에 가까왔을지라도 체득體得의 언어였으며,
너의 사색思索은 허虛에 이웃했을지라도
혈육을 감지하는 높은 혜지慧智였음을 기억한다.
잃어버린 모든 기억들을 나는 상기想起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가지 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숲 가에서 나는 너의 두개의 유치乳齒를 기억한다.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내리어라 내리어라 내리어라.
밤이 눈의 흰 깁을 빨아먹더라도
그의 이마에서 발 끝까지 와서 덮이어라.
온유溫柔의 성품性稟으로 사풋사풋 내려오는 숲의 모성이여.
숲은 내 아기의 연모戀貌
곁에 서면 세월이 머리를 쓰다듬는 소리
역사가 장신구를 푸는 소리들,
시름에 젖은 음절로 되어
꽃잎처럼 흩어져 기어다닌다.
괴괴한 이 밤의 얼어붙은 지류에서
서성이는 나의 체읍涕泣, 나의 기쁨.
내가 내 자신과 내 아가와 내 인류에게 가까이 돌아가는
청징淸澄하고 힘 있는 내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상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가지 죄의 의미를 모른다.
내 숲이여, 내 아가야, 내 자신이여, 내 인류여.
나는 참으로 단 한가지 죄의 의미를 모른다.
그때 그는 젊은 시인이었다. 동아일보를 옆으로 바라다보며 종로통에 자리잡은 ‘귀거래’ 다방에서 김광협 시인은 가장 한국적인 시를 쓰고 발굴하기위해 문학에 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는 했다. 유신의 찬서리가 태풍의 눈 가운데서 알 수없는 살벌함으로 서리고 있던 70년 대 말이었다.
이 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그의 대표작이다. 한국전쟁 때 피난 가다가 아이를 숲속에서 잃어버린 농부의 회한을 그렸다고 설명하면서 그는 검고 깊은 눈을 들어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었다. 해 마다 눈이 내릴 때마다 농부는 기억한다. 무엇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전쟁인가, 인류의 잔인한 본성인가, 부모의 과오인가… 요새 자주 오르내리는 6자 회담이니 북미수교니 하는 소식들은 과연 어떤 명분으로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했던 전쟁을 설명해 줄수 있을 것인가. 지금 몬트리올도 눈에 덮히고 있다. 그 눈은 무겁고 무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