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브 도둑
허브 도둑
장옥관
“난초 도둑” 이란 소설도 있지만 정말 허브를 도둑맞는 일이 있었습니다. 새들새들한 게 안쓰러워 거름 주고 햇볕도 주려 복도 끝 창가에 내놓았지요. 그런데 잠시...
겨울 사랑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강윤후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호수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바다와 나비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어깨너머라는 말은
어깨너머라는 말은
박지웅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문질러보는 어깨너머라는 말
누구도 쫓아내지 않고 쫓겨나지 않는 아주 넓은 말
매달리지도 붙들지도 않고 그저 끔벅끔벅 앉아 있다가
훌훌...
봉지밥
봉지밥
이병률
봉지밥을 싸던 시절이 있었지요
담을 데가 없던 시절이지요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넣고
가슴팍에도 품었지만
어떻게든 식는 밥이었지요
남몰래 먹느라 까실했으나
잘 뭉쳐 당당히 먹으면...
동거
동거
생각난다
신당동 중앙시장
팥 적은 붕어빵과 곱창으로 넘긴
그해 겨울의 저녁과 아침.
시골 여상 출신의 그대가
졸음 쏟아지는 미싱대에서
주판알 대신 올리고 내리던 기래빠시...
연탄 한 장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