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에서는 어느덧 열 번째를 맞이한 캐나다한국영화제가 한창이다. 문화 예술의 도시 몬트리올에 와서 결혼을 했고 엄마가 되어 육아뿐인 일상을 보낸 지 십 년이 넘었다. 외롭고 쓸쓸한 이방인이자 한국인 전업주부로서 몬트리올에서의 한국영화제는 유독 가슴이 아리다.
캐나다한국영화제에 가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다. 바람처럼 그곳에 갈 수도, 백 년 동안 모두를 잠들게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동화 같은 일을 상상하며 잠시 포스터에 눈길을 내어준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 속 초대받지 못한 요정이 이해되면서도 마법을 부릴 수 없음이 다행이다. 비록 멀리서나마 캐나다한국영화제의 성황리 개최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무엇보다 안전함 속에서 관객들의 뜨거운 성원이 폐막 프로그램까지 이어지길.
스치듯 지나가는 그런 날이라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무던한 날이라 이제는 더 괜찮은 일상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처럼 지루한 날도 없다. 하지만 이방인에겐 남의 나라에서의 나른한 하루도 감사이다. 엊그제처럼 또 어제처럼, 평범한 날과 날 사이에 하루하루를 묻어가며 지낸 지 오래다. 한국이 그리우면서도 네 아이들 앞에선 티 나지 않게 감추고 산다. 찰랑찰랑 넘치려는 깊고 무거운 감정을 외면하며 사느라 천날이 버겁고 만날이 아프다. 글을 쓰니 훨씬 잦아든다.
여전히 잘 된 밥처럼 한 그릇 더 당기는 맛있는 날이 있는가 하면 안 그런 날도 있다. 좀 질게 되어 죽도 밥도 아닌 날이 있고 아니면 너무 되어 퍽퍽하거나 아주 곤죽이 된 날이 있다. 그래서 맛없는 날이 솔직히 더 많다. 어쩌다 한국인을 만나 얘기라도 시원히 하는 날은 죽밥도 괜찮고 안 먹어도 배부른 날이긴 하다. 그런 날이 그리 많지 않아도 없는 건 아니니 다행이다. 이제 나에게도 같은 동네 언니들이 있어 조금씩 살맛이 나고 밥맛이 돋는다. 이 서쪽 섬의 시골 동네에 한국인은 나뿐이라 느낀 오랫동안의 외로움은 점점 가시고 있다. 그렇다 해도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화수분처럼 끝이 없다. 하지만 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도 언젠가 멈출 때가 오리라 믿으며 쳐진 어깨를 다시 바짝 세운다.
한국어 대화가 흐르는 집안의 공기가 어쩐지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영어와 불어가 오락가락할 때의 어수선함 사이로 “엄마 좋아요. 엄마 사랑해. 엄마!”라는 한국어가 막내딸의 입에서 불쑥 나온다. 그 순간 느껴지는 짜릿한 온기와 충만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천군만마를 얻어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이랄까 어느 때는 남편을 이긴 것 같아 괜스레 좋다.
캐나다한국영화제가 열 살이 되는 동안 나도 나이를 먹었지만 영화제와 같은 뜨거운 축제는 없는 삶이다. 영화 제작사에서 유명 감독님 아래서 꿈을 좇으며 시나리오를 쓰던 이십 대 때의 나를 떠올려 본다. 아이들의 피아노 리사이틀과 학교에서의 발표회에 참관하는 엄마로서의 기쁨은 있다. 하지만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느끼는 즐거움과는 분명 다른 색깔의 행복이다. 행복이라는 정의감을 부여해야만 육아에 물든 삶이 바래기보단 가치를 찾을 것이다.
얼마 전 혈액검사를 한 후 병원을 찾았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유전적 원인에 의한 하이 콜레스테롤 진단을 받았다. 매일 밤 잠자기 전에 복용해야 하는 약을 처방받아 병원 문을 나서는데 얼마나 당황스럽고 힘이 빠지던지. 임신 기간을 빼고는 과체중이었던 적이 없고 평소에도 나름 운동을 해 왔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유전성 질환이라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을 거란다. 콜레스테롤 수치를 더 높이지 않는 약을 평생 복용해야 하니 갑자기 무슨 날벼락인가 싶다.
몸속에 흐르는 혈액은 다쳐서 피가 나지 않는 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혈액의 상태에 따라 식습관과 생활습관도 때로는 바꿔야 한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신체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실감하며 지내고 있다. 하물며 자녀들의 몸 건강은 물론 영혼과 정신의 건강이 얼마나 중요할까 새삼 깨닫는다. 뜻밖의 경험을 통해 또 나를 돌아보고 자녀들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를 점검해 본다.
상상하던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삶과는 거리가 멀고 더 반대로만 가는 인생인지도 모른다. 임신 기간을 거치며 몸무게가 올라간 것 빼고는 키를 기준으로 잰 표준체중에도 이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하이 콜레스테롤 진단을 받았다. 나만큼이나 놀란 남편은 “너의 탓도 아니고 너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처방받은 약을 먹으며 경과를 지켜보자”라며 위로한다.
살아온 환경과 성장과정 때문에 무엇이든지 내 탓, 내 실수, 내 잘못을 찾기에 바쁘다. 이번에도 의사의 진단에 심한 자책이 드는 나를 남편은 바로잡아주려 애를 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거대 싱크홀 수준인 나는 구멍 난 자존감을 매우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러나 아이들 뒷바라지만으로도 버거워 내 맘을 챙기는 건 언제나 가장 뒤 순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육아와 살림도 반짝이는 일이라 여기며 서툴더라도 날마다 칭찬으로 격려해야겠다. 요리에는 재능 부족인 아내라 맛이 덜한 등갈비도 두 손에 쥐고 맛있게 먹어준다. 대만 남기고 아주 깨끗하게 뜯어 먹는 남편이 맛있다며 칭찬 세례다. 요리한 사람이 더 잘 아는 몇 퍼센트 부족한 맛인데 칭찬을 해 주니 미안하고 고맙다. 저녁 식탁 칭찬 크리에이터로서 오늘도 이렇게 노력하는 남편 덕분에 본래의 맛을 모르는 아이들도 열심히 등갈비를 뜯는다. 맛있다고 엄지척까지 하며 “엄마! 맛있어요! 나 고기 좋아요!”라는 막내 아이와 폭립 먹방에 빠진 네 아이들을 보니 걱정이 사라진다. 속으로 ‘하이 콜레스테롤도 약을 먹으면 낫겠지’라는 기대가 생긴다. 맛있게 저녁을 먹는 다섯 식구를 보니 웃음이 난다. 남편과 네 아이들의 고운 말들도 좋지만 나 스스로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우리 집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 같다. 방송인 김영철 씨가 자주 하는 말이 떠오른다. 힘을 내요 슈퍼 파워! 내 안에서 힘을 내란 말이 들리며 불끈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쥔다.
이 시간에도 병원에서 생명과 사투하는 어린아이들이 많을 텐데 우리 집 네 아이들은 작은 투닥거림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기 때문에 거친 파도 없이 소소한 일상이 가능하다. 한 주 동안 몇 번을 욱한 육아던가, 반성하고 회개하며 기도와 함께 건강한 아이들에게 다만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 육아가 끝나고 난 뒤 잠든 아이들을 보면 절로 미소가 샌다. 캐나다한국영화제처럼 최고의 축제는 즐길 수 없지만 최선의 휴식과 위안은 있다. 영화제보다는 넷플릭스로 남편과 맥주 한 캔을 부딪치며 축배를 든다. 우리 집은 비로소 축제 시작이다.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민소하
한국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신문기자로 활동하다.
2011년 몬트리올로 이주, 네 아이들을 키우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 – 민소하의 소설&에세이 SO 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