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온 뒤로 부활절 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않기는 올해가 처음이었다. 광역 몬트리올의 대정전으로 우리 집에서 모이기로 한 부활절 저녁식사는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1998년에 이어 아이스 스톰으로 퀘백주의110만여 가구가 정전되었고 온타리오주도 18만 5천 가구나 정전을 겪었다. 시속 50km 이상의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쓰러지며 전기 공급선을 파손해 대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그동안 몇 번의 어는 비를 만났지만 곳곳의 나무들이 쓰러진 건 처음 보았다.
비가 내리면 흘러가는 게 보통 일이다. 그런데 얼음비, 우박비, 아이스비 등 여러 가지 한국어로 불리는 프리징 레인은 다르다. 보통 때의 비처럼 흐르지 않고 도로에 그대로 남는다. 굉장히 무거운 물기를 머금고 있어 나무에 지붕에 창문에 내리면 그대로 얼어 버린다. 도로에는 차들이 달리는 열기 때문에 바로 얼진 않아 슬러시처럼 되거나 빙수의 얼음처럼 갈린 빗물이 그대로 길을 덮고 만다. 바깥 온도에 따라 도로를 서걱서걱 빙숫길 같게도 물컹물컹 슬러싯길 같게도 위험천만 미끄러운 빙판길 같게도 만든다. 삼사월 요맘땐 봄기운에 얼음이 녹아 매우 빠른 시간 안에 물이 불어나 길이 아주 흥건한 물바다가 된다. 물론 기온이 내려간 날엔 빠른 시간에 빙판길이 된다.
13년 가까이 캐나다에 살면서 늘 의아했던 게 있다. 프리징 레이니 데이에는 왜 학교가 휴교인가! 프리징 레인은 ‘어는 비’이다. 마치 아주 굵은소금 덩이가 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녹은 얼음이 내리는 듯 빗방울이 약간 굵기도 하다. 어는 비가 오면 기온은 영하지만 물방울로 비가 내린다. 때문에 추운 날씨에 비가 땅에 닿으면 바로 얼어 살얼음을 만든다. 이 비가 오면 나무와 지붕에는 곧바로 고드름이 달린다.
이런 날씨엔 외출도 못하니 아이들과 창밖을 보며 얼음비 아이스비 슬러시비 빙수비 우박비 등 다양한 이름으로 프리징 레인을 불러보곤 했다. 기온에 따라 도로를 빙판도 빙수도 슬러시도 만드니 매번 한 가지 이름의 비로 굳혀 부르기 어려웠다. 하나의 한국어로 표현하기 참 힘든 비다. 분명한 건 얼음비가 녹으면 길이 온통 슬러시처럼 된다. 물이 정말 상상보다 빨리 많이 고여 버린다. 이러니 프리징 레인 데이엔 학교도 문을 닫는다. 겨울에도 아이들을 학교 건물 밖 교정 안에서 충분히 활동하게 하는 캐나다지만 프리징 레인엔 학교에서의 바깥 활동이 무리다. 또한 웬만한 폭설에도 제설작업이 잘 되어 스쿨버스가 다니지만 프리징 레인 날엔 스쿨버스가 비운행이다. 프리징 레인에는 노 스쿨버스, 노 스쿨이다.
갑자기 비상 연락 메일로 당일 아침 휴교일 때도 있다. 아이들이 넷인 나는 이해 못 한 임시 휴교다. 그래서 늘 의문이었다. 운동장에 많은 물이 고이는 이유로 휴교라니 하루 종일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 내겐 불편한 휴교였다.
아이스 스톰이라 하기엔 이렇게까지 강풍이 불지 않아 얼음비 날씨의 위력을 지난 13년 동안 체감하지 못했다. 그러다 비바람에 쓰러진 나무와 전선 파손으로 인한 정전을 겪으니 비로소 알겠다. 프리징 레인 데이는 스노우 스톰 데이! 얼음 폭풍이 오는 날씨엔 휴교가 맞다. 반드시 휴교해야만 한다.
프리징 레인엔 보통 나무에 지붕에 창문에 바로바로 고드름이 생긴다. 고드름엔 물이 많아 나뭇가지가 평소보다 훨씬 무거워진다. 바람이 강하게 부니 고드름 달린 나무들이 이리저리 휘청이다 가지가 꺾인다. 바람이 부는 쪽으로.
25년 만에 강풍을 동반한 아이스 스톰에 나무들이 쓰러졌다. 얼음꽃들이 잔뜩 핀 고드름 천지 나무들이 바람 따라 제멋대로 춤추다 그만 얼음의 무게를 못 버틴 것이다. 강한 바람에 수백 년 묵은 나무의 가지도 힘을 못 쓰고 고꾸라졌다. 우리 집 뒷마당 나무도 반 이상이 꺾이고 쓰러져 남편이 톱으로 베어냈다.
나뭇가지가 꺾여 도로 곳곳에 픽픽 벌러덩 드러누웠다.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지 않고 쓰러졌다. 꺾인 나무들이 도로에 쓰러진 건 오히려 다행이다. 피해 가고 치우면 되니까.
나무들이 꺾이며 전기가 다니는 길을 막아버린 게 문제였다. 집집마다 전기 및 통신망을 공급해 주는 고마운 검은 길이 공중에 있지 않은가. 나뭇가지들이 꺾이고 부러져 그 전력선들 위로 내려 앉으며 일이 커졌다. 가가호호 불특정 다수 남녀노소 불문, 몬트리올 일부 지역과 웨스트 아일랜드 전역의 전기 공급이 중단되었다. 지난 5일 수요일 오후 6시 무렵부터 우리 동네에 사는 친한 친구 집은 10일 월요일까지 엿새 동안. 복구된 지역도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여러 SNS 매체에 금요일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태풍 수해 복구 뉴스처럼 기쁜 전기 복구 소식이다. 전기가 들어왔다는 전화에 박수 치며 환호했다.
본래 일요일에 부활절 가족 식사가 우리 집에서 있을 계획이었다. 실시간으로 하이드로 퀘백 사이트를 확인하다 토요일 아침 모임 장소를 변경했다. 다행히 토요일 저녁에 우리 집 전력은 복구되었다. 결혼 후, 팬데믹 3년 정도를 빼고 언제나 모인 부활절 가족모임을 이렇게 못 하긴 처음이다. 가족 모임을 못한 부활절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전기의 소중함, 따뜻한 집에서 머물 수 있음에 대하여, 충전한 배터리만 있다면 가족과 전화할 수 있음에 대하여, 또 전기가 끊겨 추울 때 오갈 수 있는 이웃집과 친구집이 있음에 대하여, 전기 난방이 없어도 이불을 덮을 수 있고 촛불은 밝힐 수 있음에 대하여,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누군가 함께 있음에 대하여…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에 대하여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전기는 나가고 불은 꺼지고 도시는 멈추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가슴에는 깜빡깜빡 반짝반짝 따뜻한 불이 들어왔다. 며칠 전기가 나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가족 친구 지인들의 마음을 느꼈다. 우리는 함께라 더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힘내라 격려하며 견딜 수 있었던 무전기 도시에서의 며칠이었다.
몬트리올이 아닌 웨스트 아일랜드에 살기에 전기 없이 지낸 날이 더 길었다. 하지만 하루만 아니 한 시간만 전기가 나가도 얼마나 불편한가.
프리징 레인이 부른 작은 재난 앞에 신의 큰 경영하심을 본다. 바람을 불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하는 자연의 주관자 앞에 겸손히 마음을 모은다.
하루하루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작은 고마움들을 결코 잊지 말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육아에 지쳐 쓰지 않던 감사일기를 다시 이어 쓰며 살자, 귀찮을지 모를 소일거리 하나를 내게 준다.
프리징 레인, 이 날씨엔 무조건 휴교한다에 13년 만에 나는 동의한다. 남편이 여러 번 말해 준 휴교 이유도 귀담아듣지 않았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백청이 불여일감이다.
퀘백주 몬트리올 모든 지역의 전기가 복구되어 감사하다. 바람아 멈추어 다오, 전기야 고맙다!
민소하
한국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신문기자로 활동하다.
2011년 몬트리올로 이주, 네 아이들을 키우며 틈틈이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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