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 허진 대사님2018년 신년사

2018년 신년사

교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다시 새해가 밝았습니다. 가내 두루 편안하시고 기원하시는 일이 모두 잘 되기를 간절히 빌겠습니다. 벌써 저가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재작년 이곳에 부임한 이래, 그렇게 숨 넘어가게 바쁘지도 지겨울 만큼 일이 없어 무료한 날도 없이 저의 개인적 능력에 알맞은 업무량을 소화했다고 회상하는 순간, 어느덧 3년이란 기간이 다 가버린 것 같습니다. 몬트리올에 주재하는 다른 나라 공관장들과 달리 저는 총영사직과 유엔 국제기구 대표부대사직을 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일 인분의 급여밖에 받지 않고 있다는 농담을 여러 번 지인들과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되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 인분에 합당한 성과나 업적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서 굳이 급여가 작았다고 불평하기는 다소 부당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만 헛다리 집는 쓸데없는 일 벌리기보다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될 주요사안에만 집중하면서 집행하는 일의 양보다는 질의 제고에 나름 노력하기는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체적인 평가는 타인들의 인식과는 다소의 괴리가 있기 마련이어서 저는 저의 후임에게 저가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부분을 적절히 보완해 줄 것을 당부하고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재작년 하반기부터 작년 상반기까지 불명예스런 일로 인해 정부가 교체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나, 일단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과정은 과히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쓰라린 패배와 실수를 경험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국가는 대부분 엄청난 패배와 참사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극복을 통해서만이 그 진가를 입증했습니다. 우리나라나 우리 민족은 근대사의 여러 굴곡을 경험하면서 전 세계 그 어느 민족과 국가보다도 가혹한 현실에서 생존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질긴 생명력을 간직해 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여러 부작용이 우리가 길이 보존해 온 은근과 끈기의 정서를 몰락시키면서 호들갑과 과대망상의 인터넷 시대로 돌입해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이전에 파벌주의에 근거한 남의 눈치만 보는 신민주의(臣民主義)적 태도와, 행동하기보다 황당한 말이 앞서는 후기근대사회의 저속하고 천박한 양태는 더 이상 통제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착종(錯綜)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까지 보존해 온 전통적 가치들을 하나하나 방기하면서도 아직은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혼돈의 세기를 맞고 있는 듯합니다. 교민사회의 여러 문제 역시 그와 같은 글로벌적인 위기의 재생산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본국과의 유대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캐나다 사회 내에서 훌륭한 시민으로 자리잡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본국 정부가 교민사회를 교도해 나가는 일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외부의 지원과 도움에 의존하기를 원하는 기존의 행태 또한 더 이상 어필하기 어려운 시점에 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직은 미래가 불확실한 후기근대를 논하기보다 여전히 전근대에 머물고 있는 후진적 속성을 탈각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저러한 집단주의에 머물러 있는 구시대적 신민(臣民)이 아니라 바로 근대적 자아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기에 사시는 교민 여러분들은 캐나다와 같은 선진국과 자신의 모국인 한국을 넘나들면서 올바른 자아와 사회관, 가족관을 형성해 나가기 위한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와 같은 중간자적 입장에 있는 교민 여러분들이야말로 맹목적인 국수주의와 수세적인 민족주의, 조야한 국제주의나 편협한 지역주의를 타파하는 전위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인구이동이 자유로운 현 세기에는 여러분들과 같은 존재들이 오히려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올바른 가치관들을 정립할 수 있는 조건을 향유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저는 전 세계에서 가장 교양 있는 교민사회가 존재하는 공관에 근무하고 떠나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관리들에게 난민과 범죄와 탈세문제로 정상적인 이민정책이 어렵다면 가장 모범적인 이민자 집단인 한국인을 더 받으라고 선전해 왔습니다. 저는 요인 면담 시마다 교민 여러분들은 이 사회의 기초를 흔들 만큼 위협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지한 노력으로 현지사회의 발전에 꾸준히 기여하는 고귀한 헌신으로 점철되어 왔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해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 현지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가장 큰 애국이라는 점을 굳이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저의 노력과 기여가 결코 충분치는 않았겠으나, 여러분들에 대한 좋은 인식과 느낌을 갖고 본국으로 떠나게 됨을 다시 한 번 강조 드리면서 모쪼록 행운이 따르는 새해가 되기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