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준
파주에 와서야 겨울을 긴 눈으로 본다 아침에는 두껍고 무거운 이불을 개지 않아도 되어 좋았고 오후에는 개를 잡았다며 아랫집에서 수육을 삶아왔다아버지에게는 어린 돼지를 잡은 것이라고만 말해두었다 수육이 담겨 있던 접시를 씻어 아랫집으로 간다 벌써 어두워지고 있는 마당에는 묶여 있는 개가흰 두개골을 옆에 두고 언 땅을 자꾸만 파내려 가고 있었다 내일은 큰 눈이 온다고 하고 그러면 나에게도 그 개에게도 발에 밟히는 눈의 소리가재미있게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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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시인의 시는 무심하게 시작해서 무심하게 끝난다. 하지만 그 무심함 속에 숨겨져 있는 비감마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치 영화’Fried green tomato’처럼 흘러간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얼마 후 몸서리 쳐지는 것과 같다. 그의 시에는 인간이란 어떤 기준이며 왜 먹어야 하며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기저에 깔려있고 그 물음의 뼈 속에는 슬픔이 감겨있다. 개를 잡고, 죽은 개의 두개골 옆에서 또 다른 개가 언 땅을 파는 묘사는자존감에 상처를 준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발에 밟히는 눈의 소리가 재미있게 들릴 것” 이라고 독자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박준 시인은 2008년실천문학으로 등단하고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