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

 

김기주

절간 소반 위에 놓여 있는

금이 간 화병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물을 더 부어 봐도

화병을 쥐고 흔들어 봐도

물은 천천히, 이게

꽃이 피는 속도라는 듯

조용하게 흘러나온다

아무 일 없는 외진 방 안

잠시 핀 꽃잎을 바라보느라

탁자 위에 생긴 작은 웅덩이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꽃잎보다 키를 낮출 수 없는지

뿌리를 보려 하지 않았다

쪽 귀퉁이가 닳은 색 바랜 소반만이

길 잃은 물방울들을 돕고 있었다

서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물방울들에게,

가두지 않고도 높이를 갖는 법을

모나지 않게 모이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무릎보다 낮은 곳

달빛 같은 동자승의 얼굴이

오래도 머물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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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화병, 서로 붙으려고 안간힘 쓰는 물방울들, 꽃을 보느라 눈이 가지 않는 낮은 곳… 보아도 보이지 않는 곳을 가슴에 담은 시인의 품성이 배어나오는이 시는 어쩌면 부처가 바라본 세상은 아니었을까. 모나지 않고, 무리하게 새로우려고 애쓰지 않은 담담한 시어들의 품격이 돋보이는 2013년 ‘한국경제’신춘문예 당선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