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날 미사일

흐린날 미사일

김영승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록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상하로

발을 쳤고

그 휘장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보리밭은 없어졌고

애기똥풀 군락지를 지나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계단 및 노인들 아지트는

멀리서 보면 경회루 같은데

내가 그 앞에 있다

명자꽃과 등꽃과

가로등 쌍수은등은

그 향기를

바닥에 깐다

등꽃은

바닥에서부터 지붕까지

수직으로 이어져

꼿꼿한 것이다

허공의 등나무 덩굴이

반달을 휘감는다

급한 일?

그런 게 어딨냐

           

     ‘무소유보다 찬란한 극빈’ 이라는 제목을 단 시집을 낸 시인이 무엇에 정신이 팔려 있는 지 집작이 간다.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 것에 안심하는 사이에 불안해진 독자들은 하루가 짧다고 비통해하고 좌우충돌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지는 않을까 걱정을 한기도 한다. 그들의 당위성을 한방에 허물어버리는 이 불온한 나태함이 왜 이리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