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청년화가 L을 위하여-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생전에 오직 17편의 시만을 남긴 함형수 시인의 시들은 간결하고 강렬하다. 서정주, 오장환,김관균, 김달진, 김동리와 함께 참여한 ‘시인부락’창간호에 발표한 이 시를 읽으면 화가 반고호의 그림들이 떠오른다. 1914년에 태어나 1946년에 작고하기까지 가난과 정신착란증에 시달린 시인의 생애가 ‘해바라기’를 그린 화가와 너무나 닮아서이다. 남아있는 시집 한권 없이도 이 시가 오랜 세월동안 독자들에게 애송되 까닭은 시 속에 시인 전부를 던져 태워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