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필력으로
누군가 붓을 길게 휘둘러 놓은
궁서체 같은 강줄기를 따라 걷는다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소낙비에도 물결이 고요하다
오히려 제 안으로 흡수하는 표면의 흔들림
이 세상 살아가는 일이란 저렇듯
저만의 뚜렷한 필법 한 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대출한 책 속 누군가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놓은
명구 한 줄 아직 터득하지 못한 나는 문득
진부했던 시간의 페이지를 넘긴다
그 속 서표처럼 꽂혀있는 설움 한 조각 튀어나오고
햇빛 밝은 창틀에 때아닌 그늘을 끼워 넣던 저녁이
강의 필력을 읽는다
몇 겹 물결로 출렁이는 제 안의 소요와 소를 파는 절망을
어디론가 흘려 보내고 또 흘려 보내며
오직 한자리, 저곳에서
저 만의 깊고 깊은 흐름을 구가했을 필법을 읽는다
그 옆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이 줄기를 곧게 세운다
목을 길게 뽑은 두루미들이 오랜 시간 발목을 묻는다
내 눈앞 진경으로 걸려있는 저 명서체(明書體) 한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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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세상을 한 폭의 서체로 들여다본다. 그렇지 원래 세상이 마지막에는 짧은 묘비명 한 줄로 남을 뿐인걸. 내 안의 모든 것 어디론가 흘려 보내다 보면 호방한 한 줄기 궁서체로 남을 수는 있을까… 서정임 시인은 ‘문학. 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 가 있고 현재 ‘빈터’ 동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