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에 흰 눈이 내리네 – 박철

 

세시에 흰 눈이 내리네

 

박철

 

흰 눈이 내린다

마당 가득 흰 눈이 내린다

누군 히말라야에 가서 초라한 너를 발견하였다는데

네시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서는 길

차마 흰 눈 위에 발을 딛지 못하고

마당가에 섰다가 거대한 나를 보았다

함박꽃이 되어 내리는 올해의 첫눈

너를 찾든 나를 잃든 오늘은 비긴 날로 하자

그러니 우린 하나다

지금이라도 우연히 골목에서 만나면

함박꽃 한 술 떠 서로 먹여주며

아프게 살아온 지난 여름은 잊도록 하자

그래 그러라고

세시가 지나는데 흰 눈이 내린다

 

함박눈 내리는 주말 오후에 누군가 만나러 나가고 싶게 만드는 시다. 게다가 첫눈이란다. 꽃같은 눈을 맞으며 그날은 누구와도 비긴날로 하자고 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성 지극했던 어느 겨울 한때를 떠오르게 하는 시다.     

박철 시인은 1987년 ‘창작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고, 제 12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