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로 쓰는 왕희지체

 

손택수

먹물인가 했더니 맹물이다

소흥 왕희지 사당

노인이 길바닥에서 논어 구절을 옮겨놓고 있다

페트 물병에 꼽은 붓으로

그어 내리는 획이

왕희지체 틀림없다

앞선 글자들이 지워지고 있는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그저 그어 내리는 순간들에만

집중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쓰는 글이 있다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쓰는 글도 있구나

드러나는 순간부터 조금씩 지워져 가는,

소멸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글씨체

스치는 붓으로 바닥을 닦는다

쓰고 지워지길 골백번

붓을 밀대걸레 삼아

땡볕에 달아오른 바닥의 열기를 식히며

날아오르는 왕희지체

 

시는 이문열의 단편 소설금시조 떠올리게한다.  한평생 지은 작품을 죽음을 앞두고 태워버리는 주인공의 모습이 안타까와서 숨죽이며 마지막 장을 덮었던 기억이 있다.흔적이 남지않게 맹물로 서예를 하는 사람, 자체로 수양이 되어서도라고 불리우며 예술로 대접을 받는 것도 그렇지만, 손택수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사라지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쓰는 이라는데 있다. 어느 선에서 반복되어 행위로만 남는 것을 거부하는 자세가 어찌 서예뿐이랴 시를 쓰는 것도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