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어낸 몇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3년간 도시를 떠나 강원도 문막에서 생활하며 펴낸 김선우의 2번째 시집 제목이 바로 ‘도와 아래 잠들다’.  마음의 상처를 몸의 형벌로 치환시키며 복숭아 꽃잎이 피처럼 지는 걸 다 받아내는 이 시의 깊음은얼마나 내공이 쌓여야 가능한지 부럽다고 한다면 편안한 자의 투정이 될까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