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 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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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의 5번째 시집 ‘부드러운 곡선’ 실린 이 시는 로버트 프루스트의 ‘가지 않는 길’ 과 제목이 비슷하지만 행간의 갈피마다 툭툭 걸리는 단어들은  더 절박하고 더 부침이 심한 거친 길이다. 전교조 활동을하고 교직을 잃고… 하는 동안 선택한 길을 온전히 자신의 안에 받아들이는 모습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