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

가을 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서 시험에 나올까봐 여러번 읽다가 그만 뒤집어 생각해볼  사이도 없이 익숙해서 버린 시 ‘가을 날’.

릴케는 말년에 “프랑스를 좋아하고, 독일어를 쓰며, 체코 여권을 가지고, 스위스에 체류하는” “유럽인”으로서 독일 대표 시인이지만 서로 국민 감정이 좋지 않은 프랑스와 독일 양쪽으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했다. 1차 대전이 끝나 후 독일 사회주의 운동과 연관되어 스위스로 도망가 살기도 한 그가 남긴 따뜻하고 오랜 시 한 편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