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봉사의 삶’정영섭 박사 별세…향년 89세

미생물유전학·생명공학 분야 선구자이자 한인사회 지도자

한국과 캐나다 잇는 학술·문화 교류에 평생 헌신

미생물유전학과 분자생물학, 생명공학 분야의 발전에 기여하고 몬트리올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해 온 정영섭(Young Sup Chung) 박사가 지난 8월 28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정 박사의 별세는 평생의 반려자였던 고 정인희(Inhi Angelica Chung) 여사가 지난해 9월 5일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두 사람은 60년간 부부로 함께하며 가족과 학문, 지역사회 봉사를 중심으로 한국과 유럽, 캐나다를 잇는 삶을 일궈왔다.

1937년 인천에서 태어난 정 박사는 미국 퍼듀대학교(Purdue University)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뒤 독일 기센대학교(University of Giessen)에서 수학해 1964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갔으며,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대학교와 연계된 팔로알토의학연구재단에서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밟았다.

1969년 몬트리올에 정착한 그는 이듬해 몬트리올대학교(Université de Montréal) 생명과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1979년 정교수가 된 뒤 명예교수로 재직하며 뛰어난 학문적 역량과 따뜻한 인품, 교육에 대한 헌신으로 여러 세대의 학생과 동료 연구자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정 박사는 미생물유전학과 분자생물학, 생명공학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DNA 복구 기전과 생물학적 방제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생물학적 살충제를 비롯해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전 세계 연구자들과 협력하며 150편이 넘는 논문과 학술 발표물을 남겼고, 과학자이자 교육자·연구 멘토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학문적 활동은 한국과 캐나다의 관계를 강화하는 가교 역할로도 이어졌다. 정 박사는 양국의 대학과 연구기관 간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과학자와 교수, 학생들이 국경을 넘어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Institut Pasteur)를 비롯해 독일의 여러 대학, 일본 나고야대학교, 한국의 한양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등에서 초빙교수와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988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캐나다 위크’에 퀘벡 대표로 참가하며 자신이 태어난 한국과 새로운 삶의 터전인 캐나다를 잇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8년 몬트리올 한인학교 설립

정 박사는 학계뿐 아니라 몬트리올 한인사회의 성장과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78년 부인 인희 여사와 함께 몬트리올 한인학교를 설립해 한인 차세대들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 민족적 뿌리를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한인학교는 이후 수많은 한인 청소년이 자신의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을 배우는 소중한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몬트리올 한인사회 평의회에서 활동했으며 캐나다 한인학술협회 사무총장, 캐나다한인과학기술자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인 문화단체와 가톨릭 공동체의 자문을 맡았고, 1982년 리자이나에서 열린 캐나다 최초의 다문화주의 회의에 연사로 참석하기도 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에는 몬트리올 한인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대한민국 선수단을 지원했다. 이는 한국과 퀘벡 모두에 역사적인 의미가 컸던 국제행사의 성공적인 개최와 양국 교류에 기여한 대표적인 활동으로 평가된다.

캐나다·퀘벡·한국과 교황청이 공로 인정

정 박사의 학문적 업적과 공공봉사는 캐나다와 퀘벡, 대한민국 정부와 교황청을 비롯한 여러 기관으로부터 폭넓게 인정받았다.

1993년 퀘벡주 최고 권위 훈장인 퀘벡국가훈장 기사(Chevalier de l’Ordre national du Québec)에 선정돼 C.Q. 칭호를 받았다. 1996년에는 예루살렘 성묘기사단 기사대십자(Chevalier Grand-Croix de l’Ordre du Saint-Sépulcre de Jérusalem)에 서임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과학 분야 국가훈장, 2008년 교육 분야 국가훈장을 수여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2001년에는 캐나다에서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권위의 영예 가운데 하나인 캐나다훈장 회원(Member of the Order of Canada)에 임명돼 C.M. 칭호를 받았다.

이어 200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50주년 기념메달, 2012년 즉위 60주년 기념메달을 받았다. 몬트리올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를 인정받아 2005년 몬트리올대교구의 이냐스 부르제상(Ignace Bourget Award), 2009년 캐나다 정부의 시민공로표창(Citation for Citizenship Award)도 수상했다.

2007년에는 캐나다 총독으로부터 정식 문장(Coat of Arms)을 수여받았다. 2009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평신도에게 수여하는 교황청의 높은 영예 가운데 하나인 성 대그레고리오 대교황 기사단 기사장(Knight Commander of the Order of St. Gregory the Great)에 정 박사를 임명했다.

“업적을 넘어 교육과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 삶”

그러나 고인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은 수많은 직함과 훈장보다 교육과 문화교류, 공동체를 향한 변함없는 헌신을 그의 가장 큰 유산으로 기억한다.

정 박사는 학문과 문화, 과학을 통해 한국과 캐나다 사이에 견고한 다리를 놓았으며, 그가 구축한 협력 관계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고 끊임없는 호기심과 겸손함을 간직했던 그는 과학 연구에 쏟았던 열정과 성실함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보여줬다. 무엇보다 가족과 친구, 학생과 동료를 소중히 여겼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규창(Rex Kyu-Chang Chung) 씨와 며느리 이지나(Jeena Lee) 씨, 손주 이사벨라(Isabella), 맥스웰(Maxwell), 알렉산더(Alexander)가 있다. 딸은 피아니스트 정윤희(Lucille Yoonhi Chung) 씨이며, 사위인 피아니스트 알레시오 박스(Alessio Bax) 씨와 외손녀 밀라(Mila)가 있다.

고인의 장례미사는 지난 9월 2일 몬트리올 한인천주교회인 성 앙드레 김대건 성당(Église catholique Saints-Martyrs-Coréens)에서 크리스티앙 레핀(Christian Lépine) 몬트리올대교구장 주례로 거행됐다.

정영섭 박사가 남긴 유산은 사랑하는 가족과 그가 가르치고 이끌었던 수많은 제자, 발전에 기여한 과학 연구, 그리고 평생 봉사한 공동체 안에 계속 살아 숨 쉴 것이다.

그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한국과 캐나다를 더욱 가깝게 연결했다. 그의 삶은 눈부신 성취의 역사인 동시에,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 깊은 봉사의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