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하나 에세이 5 – 풀잎사랑 대신 그대는 깻잎 깻잎 깻잎!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한 주 동안 날씨가 참 맑고 산뜻하다. 움츠러든 의지와 구겨지고 모난 마음도 다시 쫙 펴질 것만 같은 오월이다. 아이들은 환절기라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면서도 한낮엔 짧은 옷을 입고 햇볕 아래서 신나게 뛰어논다. 마당 있는 주택에 사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천국이지만 남편에게는 숙식제공 노동 현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실질적인 주인은 은행이고 남편이 나 홀로 직원이자 현장 소장으로서 살뜰히 집을 관리한다. 비 갠 뒤라 그런지 잔디 깎기부터 주차장 아스팔트 재칠에 자동차 엔진오일 교체까지 할 일들이 줄을 잇는다. 위험성 때문에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는 모터사이클 타이어까지 바꿔야 해서 봄나들이 한 번이 쉽지 않다. 운동신경이라곤 일도 없는 내가 운전이 가능하고 자전거도 탈 수 있으니 다행이다. 집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공원도 최소 세 곳은 있고 운전도 할 수 있으니 급하게 떠나는 피크닉도 가끔 즐긴다. 네 아이들을 데리고 나서야 하는 게 어렵지만 유난히 할 일 많은 짤막한 봄 주말엔 남편에게 일할 자유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야 주택에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여전히 핸들을 돌려 회전하는 걸 무서워하면서도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나서며 집을 비워준다.

꼭 모기지만이 아니라 안팎으로 부지런함이 있어야 주택의 맛을 제대로 느끼며 살 수 있다. 양호한 주택 상태 유지를 위한 관리 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마당이 딸린 주택에 사니 감사하지만 약간의 강박도 분명히 존재한다. 집에서 채소를 키워 유기농으로 식구들을 먹여야 할 것 같은 무언의 무언가가 해가 갈수록 느껴진다. 직접 일군 텃밭에서 각종 채소를 얻어 식구들을 위한 식탁에 올릴 때 주부로서의 어깨도 한껏 올라간다. 그 순간의 행복을 맛보면 절대 한 해 농사로 끝낼 수가 없다. 주택살이의 즐거움을 스스로 찾아가고 작은 성취에 기뻐하며 씨앗의 열매화 과정에 생명 성장의 놀라움에 점점 빠져드는 것이 환영할 만한 일복이다.

주택에 살면 남편이 전담하든 아내와 남편이 분담하든 주택 보수와 유기농 채소 재배가 적절히 균형을 이뤄야 한다. 마당 한쪽에 각종 채소들을 가꾸며 작게라도 농사를 짓고 바지런히 사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주택에 살지 않아도 아파트나 콘도에서도 한국 채소를 직접 키워 드시는 분들이 정말 많다. 항상 그분들의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부지런함에 존경심이 인다. 텃밭 농사계의 신으로 우리 동네에서 일명 문익점으로 불리는 한인 언니 덕에 이제 서너 해 깻잎 몇 번 거둬본 나는 명함도 못 내민다.

남편의 한국 음식 사랑, 특히 깻잎 사랑은 못 말린다. 서서히 바비큐의 계절이 오는 게 좋으면서도 깻잎을 먹기 위해 고기를 찾는 남편이 거짓말 조금 보태어 무섭다. 그대는 풀잎 풀잎 풀잎 나는 이슬 이슬 이슬… 풀잎사랑은 싱그럽고 촉촉하기라도 하다. 하지만 꼭 채소 농사를 지어야만 하는 이유는 남편의 한식 사랑 때문이다. 아주 조금은 나를 부지런한 아내로 만들어 버리는 남편의 깻잎 사랑은 아무도 못 말린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하필이면 깻잎과 찰떡궁합인 삼겹살의 맛을 그는 이십 대 초반에 벌써 깨우쳤기 때문에.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한국의 맛에 흠뻑 빠진 남편은 가을이면 마흔일곱 살이 된다. 삼십 년 가까운 내공의 한국인 입맛을 가진 이 중년의 캐나다 남자는 삼겹살도 좋아하지만 깻잎을 더 기다린다. 상추와 깻잎에 편 썬 마늘과 쌈장 그리고 파무침까지 찾는 남편을 어떤 땐 정말 파묻어버리고 싶다. 집 관리도 그렇지만 네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남편의 참여도가 높기에 차마 땅을 팔수는 없다. 사무치게 타는 속을 그저 내 가슴에 묻어놓고 산다. 정말 봄이 오니 깻잎 키울 생각에 벌써부터 신난 남편이 참 해맑고 사랑스럽다. 글이 더 따뜻해지려면 그렇게 써야 맞는다.

우리 집은 웨스트 아일랜드에서도 거의 끝 쪽에 있어 몬트리올의 콘도보다도 저렴하다. 인간의 우매한 생각에서 비롯한 우생학의 개념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금수저 흙수저 정도는 익히 들어 잘 알 것이다. 우생학적으로 보자면 흙수저에 속할지 모르는 남편의 경제적 여건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배우자 기도에서 내가 유일하게 빼 먹은 항목이 리치 남편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것만 빼고 다른 모든 것을 들어주신 신께 감사할 뿐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은행에 기대어 집을 장만했고 십삼 년 사이 이사도 여러 번 다녔다. 오 년마다 해야 하는 모기지 변동금리 갱신을 이제야 처음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팬데믹을 지나며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만큼 모기지를 맞이할 신성한 각오가 되어 있다. 그동안 산후 우울증이나 무기력, 이민자 중에서도 더욱 고립자로서의 외로움 등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모기지 상환의 현실과 앞으로도 한참 남은 성실한 대출자의 삶을 생각하니 아찔하면서 정신이 든다. 내면에 대한 각성을 내세워 나 자신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기 보다 환경을 바꾸려 했던 것이 그저 부끄럽다. 남편은 내적인 아픔에 헉헉이는 나를 받아주느라 속으로는 이사를 반대하면서도 몇 차례 집을 옮겨주었다.

모기지를 극복한 사랑이라니 정말 (우리 부부의)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닐까. 모기지 앞에 서니 별의별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우울한 마음에 이사를 결정한 미친 아내의 뜻을 받아주다니 어쩌면 남편이 더 사랑에 미친 사람이구나’ 싶다. 모기지 앞에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나라면 그렇게 이사하지 못했을 것 같다. 아내의 말에 빠듯한 급여로 고단한 길을 선택해 준 남편에게 갑자기 더욱 고맙고 미안해진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어쨌든 나에게 미쳐있는 사람과 평생을 사는 건 행복한 인생이다. 어떻게든 훈훈한 마무리로 글을 쓰고 싶다. 본의 아니게 오늘은 깻잎에 미친 남편을 돌려까기 한 것 같다. 캐나다인이지만 삼겹살엔 쌈장을 아는 매운 걸 나보다 더 잘 먹는 이상하고 별나지만 하나뿐인 남편을 사랑한다.

한국에서의 결혼식이 있었던 오월의 어느 날을 시부모님께서 보내주신 축하카드를 받고서야 알아챈 우리 부부. 며칠 전까지 이야기하던 결혼기념일, 서로에게 중요한 날을 잊었지만 주말에도 못 쉰 남편이 안타까워 화도 안 났다. 이제 전우애가 싹튼 것일까. 특별한 날을 아이들의 평화 속에서 아무 투닥거림 없이 잘 지나간 것에 감사한 우리는 칠월의 캐나다 결혼기념일을 기약했다. 그날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일 일도 모르는 것이 인생사, 후회 없이 오늘의 행복을 위해 살고 싶다. 칠월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와 별표를 큼지막하게 해 둔 나는 정말 반전 있는 아내다.

민소하
한국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신문기자로 활동하다.
2011년 몬트리올로 이주, 네 아이들을 키우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 – 민소하의 소설&에세이 SO 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