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하나 에세이 3 – 봄비로 피어날 꽃 한 송이를 기다리며

몬트리올로 가는 고속도로 대교를 달리다 불어난 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지니 봄이 온 것이 느껴진다. 사월의 샤워에 오월엔 꽃들이 활짝 핀다는 표현을 하며 봄비에도 감사하는 캐나다인들이 부럽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기도 하지만 몇 개월 동안 겨울 왕국에서 살았지 않은가. 이제 좀 따뜻해지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다. 봄인 듯 봄 아닌 봄 같은 날씨에 꺼냈던 짧은 옷을 도로 넣고 다시 긴 옷차림이다. 줄 듯 말 듯 안 주고 올 듯 말듯 안 오는 심술쟁이 봄 햇살이라 더 기다리는지 모른다.

세 곳의 기후가 만나는 지역이 몬트리올이라는 걸 남편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참 변화무쌍한 날씨의 도시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민자로 지낸 시간이 얼마 안 되지만 일기예보를 챙기는 습관 속에서도 캐나다 동부의 날씨가 종종 얄밉다. 눈이 오면 눈을 즐기고 비가 오면 꽃이 필 것을 기대하는 남편과 달리 여전히 나는 한국 생각이 난다. 일본에서 건너온 꽃이란 게 아쉬울 뿐 만개한 벚꽃은 죄 없이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다. ‘봄이면 꽃축제 정도는 해서 길고 긴 겨울을 잘 견뎌온 민심을 위로해야지! 눈의 나라에서 겨우 버텼는데 이제는 또 비! 역시 한국이 최고야!’ 속으론 기승전 한국이다.

몬트리올 외곽에서도 더 서쪽에 살고 있는 나는 마음을 나눈 한국 사람이 손에 꼽힌다. 한국인이 꽃보다 귀한 지역이 우리 동네다. 마켓이나 쇼핑몰에 가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물건을 사기 시작했다.  혹시 한국인이 있는지 찾는 행동이다. 다 서쪽 섬 끝으로 이사 와서 생긴 버릇이다. 외로움에 힘들 때마다 혼잣말을 하듯 기도했다. ‘동네 마실이나 산책을 함께 하거나, 서로 시간이 맞으면 차 한잔 같이 마실 수 있는 한국인 한 명만 보내주세요!’라고.

그런데 무려 십 년 만에 소원을 이뤘다. 바로 앞 끝 겨울에 기적처럼 만난 두 분의 언니들이 있다. 이제는 전화 한 통에 열 일을 접고 버선 발로 달려가 만날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물론 버선 발로 달려가다간 큰일 날, 계속 빨간불에 걸려도 차로 십분 안에 닿을 거리에 언니들이 산단 말이다. 나에게는 그야말로 당첨된 복권이다. 결정적 한 방이 필요할 때 늘 안 맞는 남편과는 차원이 다른 언니들은 로또, 내 생애 봄날이다.

이 두 언니들의 집에 가보곤 놀라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집안에 예쁘고 고운 화초들이 어찌나 많던지 꽃들이 반기는 집은 생기가 돌아 더 환하고 참 밝았다. 부러워하는 나를 눈치채고는 언니들은 위로를 건넸다.

“나도 우리 아이 어렸을 땐 화초 못 가꿨어요. 우린 아이 하나인데도 식물에 눈 돌릴 시간이 없었어요. 우리는 아이 하나니까 식물도 키우는 거야. 지금은 네 아이들을 잘 키울 때지. 식물은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그때 가꿔도 늦지 않아요. 네 아이들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화초뿐 아니라 씨앗도 발아해 직접 화분에 채소를 키우고 무농약으로 손수 재배한 채소들로 건강하고 풍성한 식탁도 즐긴단다. 나는 모종조차 키울 엄두를 못 냈고 그동안 거의 사서 먹었다. 식물을 보며 연신 탄성과 탄식을 오가는 나를 보며 화초 가꿀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네 아이들을 육아 중인 걸 애써 치켜세워준다. 사실은 마음의 여유와 부지런함이 딸려 식물을 못 키우는 처지인데 언니들의 배려 섞인 말에 부끄러움이 쏙 들어간다.  속으론 게으름을 반성 중이었는데 졸지에 미래 인재 양성에 힘 쏟는 엄마로 전세 역전이다.  게으름뱅이의 부끄러움이 언니들의 말 한마디에 육아하는 엄마로서 더욱 필승을 다짐했다.

언니들 집에 다녀온 후 작은 용기가 생겼다. 처음이라 실패할 수도 있지만 나도 한번 채소의 씨앗을 화분에 심어볼까 하는 긍정심이 일었다. 어떤 선택을 하기까지는 심사숙고하지만 선택한 뒤엔 빠르게 행동에 옮기는 편이다. 마침 도서관에서 나눔한 무 씨앗이 집에 있었다. 발아를 위해 그것들을 물에 담가 두었더니 이틀 뒤에 싹이 튼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생명의 신비가 느껴져 콧노래를 부르며 씨앗을 화분에 심고 물을 주었다. 순이 잘 나오길 기도하면서.

그러고 보니 지난 아이스 스톰에 쓰러진 뒷마당 나무, 여름에 불멍할 때 쓰려고 그것을 베어 한 편에 뉘어 놓았다. 꺾인 그 가지들에서도 파릇파릇 여리지만 강한 새순이 올라오고 있다. 봄비를 흠뻑 맞더니 잔디 위에 누운 나뭇가지들 사이사이로 초록빛 연한 새싹들이 한가득 돋아난 것이다. 신께서 빚은 온 세상 만물이 소리도 없이 저마다의 기적을 뽐내는 봄이다. 봄다운 봄이 오려다 말고 우리와 밀당을 하고 있으니 사월의 끝자락에 심은 씨앗도 생명을 내리라 믿는다. 처음 시도한 일이니 새싹이 안 올라오거나 더디 돋아도 실망치 않기로 했다. 온기가 있는 집안에서 씨앗을 심어 모종으로 키우고 빅토리아 데이 즈음에 바깥세상을 느끼게 해 주자 싶다. 초여름인 듯 아주 짧게 왔다 갈 봄이란 녀석을 허브와 채소 모종들과 함께 반가이 맞을까 한다.

남편이 아닌 내 손으로 집 텃밭을 일굴 생각을 하니 기대되는 마음이 크다. 생각과 마음을 스스로 다스림 앞에 언제나 무너지기 일쑤인 내가 다른 생명을 돌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셋째 아이가 학교에서 심은 씨앗을 집에 가져와 물을 준 지 열흘이 지났다. 우리 아이들 돌봄에도 자주 숨이 차는데, 숨이 멎을 것 같다. 그 작은 씨앗 하나에서 싹이 나와 작고 여리지만 이파리가 올라오는 걸 보니 생명의 경이로움에 정말 말문이 막힌다.

빗줄기만 내리 뿌리다 마는 게 캐나다의 봄인가 싶어 괜스레 불뚝거릴 참이었는데 큰 실수를 할 뻔했다. 하마터면 코앞에 와 있는 몬트리올의 오월, 봄을 우습게 볼 뻔했다. 계절에 대해서도, 생명에 대해서도, 우리의 삶터인 캐나다 몬트리올에 대해서도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사람에 대해서는 더 생각과 마음 그리고 말을 조심해야 한다. 창조의 섭리와 생로병사의 순리에 따라 봄은 말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우리 사람들처럼.

봄은 말을 아끼고 가만히 조용히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며 제 할 일을 한다. 생명을 품고 키우는 일을 하는 이 계절이 나보다 낫고 대견하다. 봄을 타는지 요즘 남편의 일상이 힘에 부쳐 보인다. 여섯 식구의 가장으로서 티 안 내고 하루하루를 감당하는 남편을 보며 안타깝고 참 미안하다. 안 맞아도 내가 선택한 사랑이니 더 이해하고 품어주자 기도하게 된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기 전에는 결코 누구의 삶의 무게를 함부로 진단할 수 없다. 말 없는 봄처럼 지혜로운 사람이고 싶다.

새로운 생명을 키우기란 쉽지 않음은 꼭 다산의 여왕이 아니어도 익히 안다. 다산의 서민인 나는 네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벅차 식물 키우기는 남의 나라 얘긴 줄 알았다. 어느새 싹이 트는 것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아니 딸들보다 더 신기해하고 호들갑이라니. 남의 나라에서 맞는 봄 한번 참 남다르다.

언니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식물 키우기로 이어졌다. 탈탄소와 탄소순환에도 기여한다면 지구 건강에도 한몫을 하는 셈이다. 역시 말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좋은 사람들과 따뜻한 마음을 요란치 않은 말로 주고받으며 서로를 토닥이는 한주를 보내보자. 봄비 뒤에 활짝 피어날 오월의 아름다운 꽃, 그 꽃 한 송이가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민소하
한국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신문기자로 활동하다.
2011년 몬트리올로 이주, 네 아이들을 키우며 틈틈이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sohami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