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희 월드옥타 사업담당 부회장 / 써니즈 그룹 회장 : “꿈과 희망을 놓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노성희 써니즈 그룹 회장은 월드옥타 사업담당 부회장으로 21대 집행부의 핵심인사중 한사람이다. 그녀는 지난 2년 동안 때로는 장영식 회장과 함께 그러나 대부분은 회장을 대신하여 세계를 누벼 왔다. 밴쿠버, 토론토, 프랑크푸르트의 차세대 통합 무역스쿨에 참석했고 하노이, 광저우, 로스앤젤레스, 비엔나의 글로벌마케터스쿨에서 강연을 해 왔다. 그녀는 강의를 통하여 “글로벌마케터는 모국 중소기업의 해외진출의 교두보이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면서 “글로벌마케터들이 교육을 이수한 후 활발한 활동을 통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글로벌마케터는 월드옥타의 핵심사업으로써 2017년부터 월드옥타가 시행하는 해외지사화사업의 수행인력으로 해외 지사 설립 여력이 부족한 국내 중소기업의 현지 지사 대행 역할을 한다. 이번 몬트리올 지회의 행사의 대주제가 글로벌 마케터와 차세대를 통한 지회활성화인 만큼 느낌이 특별하다는 그녀의 얘기가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노성희 부회장의 이력은 독특한 점이 있다. 그녀는 1986년 일본인 관광 가이드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이래 1992년 한국으로 출장 온 일본 버스회사 중역들을 안내하던 중 발생한 대홍수에서 출장자를 모두 안전하게 구조하고 짐까지 잘 챙겨 귀국시킨 사건으로 일본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유명해 졌다. 이후 오키나와 – 서울 직항편이 열릴 때 통역을 맡게 되며 알게된 후쿠오카 출신의 일본인 사업가 기노시타 게이이치로씨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아 이듬해 결혼하며 사업에 뛰어 들게 된 그녀는 일본의 대표적인 휴양지 오키나와를 거점으로 1993년, 건축과 주택관리 사업을 시작으로 2004년부터는 써니즈 프로젝트(Sunny’s Project)를 설립, 주력사업인 호텔 비즈니스 및 예식장, 레스토랑, 다이빙숍 등의 사업을 함께 일구며 성장을 거듭해 왔다. 호텔, 웨딩, 건축업으로 연매출 1,000억이 넘는 탄탄한 기업을 구축한 것이다. 그룹 이름 써니즈에는 ‘태양과 같은 밝고 포근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써니즈에는 부동산 및 건축회사인 써니즈 하우징, 건축자재 수입 회사인 써니즈 트레이딩, 콘도미니엄식 호텔을 경영하고 이를 지원하는 사업체인 써니즈 여행사와 써니즈 웨딩, 다이빙숍 써니즈 등이 소속되어 있다. 그는 기업운영에 바쁜 가운데 봉사에도 소홀하지 않아 많은 단체에 꾸준히 기부해 오고 있으며 도쿄지회 역사상 첫 여성 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다음은 노성희 회장과의 일문일답
Q. 회장님은 일본에서 성공한 한국인 기업가의 표상과도 같은 존재라 들었다. 그 과정을 상세히 들었으면 한다.
저는 이제는 창원으로 통합되었지만 예전의 명칭, 경남 마산 생으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상 고교를 중퇴했다가 나중에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마저도 중도에 그만두고 일본어를 공부했다. 마흔이 넘어서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남편과 함께 지금의 써니즈 그룹의 모체가 된 써니즈 트레이딩을 창업했을 당시 우리는 한국에서 건축자재를 수입해 판매했다. 남편과 함께 미군의 맨션과 건물을 관리하는 사업도 겸했다. 그러나 처음 5년 정도는 보증인이 없었기에 은행 융자조차도 받지 못했고 현지 회사들의 공격도 많이 받아 어려웠다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급적 눈에 띄지 않게 조심조심 일을 하면서 꾸준히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 등 지역 주민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나갔다. 이후 사업이 점차 안정화하면서 1998년부터는 100% 순자산으로 콘도미니엄식 호텔을 지었다. 현재 써니즈 소유의 호텔은 비치사이드, 오션 프런트, 라멜, 넵춘 등 4개 시리즈로 구분된다. 미군 전용인 넵춘 시리즈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시리즈는 모두 나하 국제공항에서 20∼30㎞ 떨어진 오키나와 중부 지방에 있다. 이중 비치사이드 시리즈는 연간 가동률 95%, 리피트율(재방문율) 65%를 유지하고 있을 만큼 인기가 높다.
물론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부부가 한 명씩 아이를 둘러업고 각자 다른 미군 전용 맨션이 밀집된 지역을 3시간씩 산책 삼아 다니며 빈집을 찾아냈다. 그렇게 빈집 관리 건수를 늘려나갔고, 3년이 지나자 오키나와 전체 미군 주택 6천 채 가운데 1천400건을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사업 자금이 없던 우리는 그 주택의 보증금을 자본금으로 매년 한 채씩 외국인 전용 맨션을 지어 나갔다. 2003년 건축회사를 설립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써니즈를 비켜가진 않았다. 미국의 경제가 어려움을 겪자 미군기지도 축소됐고, 군인들도 기지 영내로 들어가면서 오키나와 부동산 회사들은 엄청난 위기를 겪으며 부도가 속출했다. 300여 개가 넘던 오키나와의 부동산 회사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겨우 30여 개. 써니즈의 관리 건수도 1천400건에서 3년 만에 120건으로 감소했다. 위기였다. 다만 이 어렵던 시기 저의 선택은 리모델링이었다. 개인저축을 털어 맨션이 빌 때마다 1채씩 호텔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맨션은 처음 설계 단계 때부터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둘로 나누어 개조할 수 있게 전기와 수도배관을 깔아 놓았으므로 리모델링이 용이했다. 이렇게 위기를 돌파하자 드디어 기회가 왔다. 콘도식 호텔을 찾는 고객이 늘었던 것. 저는 호텔과 연관된 웨딩업에도 뛰어들었고 사업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운도 따라주었던 것 같다.
Q. 월드옥타 제21대 집행부의 핵심 부서인 사업 담당 부회장으로 지난 2년간 봉사하셨는데 옥타 입문과정은 어떠셨나 ?
원래 한인 커뮤니티가 없는 오키나와에서 혼자 사업을 하다가 도쿄에 지사를 내면서 이곳에 한인 단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워 어떤 한인단체들이 있는지 탐문했고 많은 단체 중 월드옥타가 개인적으로 가장 잘 맞는다고 판단해 2009년 10월에 가입했다. 지난 10여년 나의 선택 중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 옥타내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옥타의 사업방향과 역동적인 활동들도 마음에 쏙 들었다. 스스로도 열심히 활동했던 것 같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채로 옥타에 몰입하다 보니 가입 7년 만에 회장이 되어 있었다. 여성으로서는 처음 이라고 들었지만 저는 그저 선배들의 전통을 잘 이어가며 단합된 조직을 만드는 것이 회장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옥타인으로 살고 있다.
Q. 몬트리올과 한국의 차세대에 당부의 말씀 한마디 부탁드린다.
동경 지회장시절부터 차세대 글로벌 한상의 육성 문제를 깊이 고민해 왔다. 제21대 옥타 집행부의 부회장 책임을 맡게 되면서 이는 더욱 큰 숙제로 다가 왔다. 지난 2년간 세계 각 지역의 차세대 무역스쿨에 가능한 참여하려고 노력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차세대 육성은 옥타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투자이다. 이런 점에서 몬트리올지회가 차세대 육성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며 주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차세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긴 미래를 보고, 꿈을 설계하고, 그 꿈을 위해 진심을 다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엄격히 점검하다 보면 그 하루하루가 쌓여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꿈의 실현과 성공이 따라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꿈과 희망을 놓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한 성공은 눈앞에 있다. 이 말씀을 강조해서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