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달
이운진
기억을 허문다
내가 온갖 죄를 지은 저 아름다운 시절과
돌림병같던 청춘을 헐어서
기억으로도 돌아갈 곳이 없어졌으면 하고
어느 날 내가
당신을 처음 알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작은 짐승
작은 짐승
신석정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 소나무 / 참나무 /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사라진 손바닥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행복한 산책 – 노혜경
행복한 산책
노혜경
한밤중 숲으로 난 작은 길을
난 걸어갔네
내 뼈에서
살점들이 잎사귀처럼
지는 소리를 들었네
무엇이 남았는지는 모르지
아직도 뛰는 심장소리 들리지만
난 한없이 걸어 여기
너무, 너무 와 버렸으므로
펄럭이는...
님
님
-김수환 추기경님 영전에-
어디인지 모르고
저희들
여기 이리 서 있어요
동녘 하늘 밝아오지만
가는 길
아직도 몰라
님이여
우리 이렇게 아직도 서성입니다.
부디
손짓해 주세요
손수건을 접고
이제 걷기 시작할래요
바람이
차요
이젠 쉬세요.
김지하 모심
김지하 시인은 1973년 봄...
친구를 위하여
이해인
올 한 해도
친구가 제 곁에 있어
행복했습니다
잘 있지? 별일 없지?
평범하지만 진심 어린
안부를 물어오는 오래된 친구
그의 웃음과 눈물 속에
늘 함께...
필법
서정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필력으로
누군가 붓을 길게 휘둘러 놓은
궁서체 같은 강줄기를 따라 걷는다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소낙비에도 물결이 고요하다
오히려 제 안으로 흡수하는 표면의 흔들림
이 세상...
말의 재활용
한혜영
쓰고 남은 말을 쌓아두는 야적장이 있다면
나는 삼백육십오일 창고에 갇힐 거야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송전탑처럼 가시가 돋친
부러진 삽날처럼 뒹구는
쏙쏙 알맹이만 발라먹은 게 껍질 같은
레게머리처럼 가닥가닥 배배 비틀어 꼰
반쯤...
사과
박애린
당신이 한 입 허둥지둥 베어 물고 나간 자리
남겨진 내 입술이 살며시 포개어 있다
움푹한 상처 위로 지나친 시간들은 고여 들고
당신을 붙잡고 싶듯
두 손 꼭 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