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의 비망록

▲ 망월동 5.18 묘역에 뭍혀 있는 민주 영령들. ⓒ 김명곤

한 ‘꼴통’ 기독교인의 참회록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오월은 왔다 비수를 품은 밤으로
야수의 무자비한 발톱과 함께
바퀴와 개머리판에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를 새긴
전차와 함께 기관총과 함께 왔다
오월은 왔다 헐떡거리면서
피에 주린 미친 개의 이빨과 함께
두부처럼 처녀의 유방을 자르며
대검의 병사와 함께 오월은 왔다
벌집처럼 도시의 가슴을 뚫고
살해된 누이의 울음을 찾아 우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뚫고
총알처럼 왔다 압제의 거리에
팔이며 다리가 피묻은 살점으로 뒹구는
능지처참의 학살로 오월은 오월은 왔다 그렇게 ! (이하 생략)

참여 시인 김남주는 1980 광주민중항쟁의 실상을 한 치의 절제도 허용하지 않은 시어(詩語)로 토해냈다. 그가 당장 체험한 5월은 푸른 색깔이 아닌 검붉은 핏빛으로 적셔지고 얼룩진 도화지같은 계절이었다. 어버이와 어린이라는 단어가 넘실댔어야 할 1980년 대한민국의 5월은 열흘동안 밀폐된 도시에 갖혀서 몰매를 맞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너무도 고통스런 계절이었다.

미리 고백하건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투성이에 끼인 나는 그 봄을 너무 황홀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 푸르름의 5월, 연희동 거리에서 

39년 전 1980년 5월, 서울에서 내가 맞은 5월은 눈부시게 아름답기만 했다. 어느날부터인지 머리 벗겨진 군인 아저씨가 TV에 등장하여 무표정한 얼굴로 ‘수사 중간보고’니 뭐니 하는 것을 읽어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며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고는 있었으나, 때는 싱숭생숭 상춘가절이었다. 나는 고약한 고참의 고문에 가까운 매질에 밤마다 곡소리를 질러대던 군대생활에서 막 해방되어 복학생의 여유로움으로 조는듯 꿈꾸는듯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랬다. 제대한지 6개월이 막 지난 어느날 벌어진 군사 쿠데타로 더렵혀진 서울 하늘은 그 봄 내내 시민들의 마음 한켠에 잿빛 그늘을 드리우기는 했으나, 계절만은 그 푸르름의 빛깔을 더욱 짙게 뿜어내고 있었다. 교문밖에서 흘러 들어온 최루탄 냄새를 잊어버리게 할 만큼 5월은 여전히 푸르렀고, 깡촌 출신인 나는 그 푸르름에 흠뻑 취해 있었다. 어차피 썩어 없어질 세상에서 그들은 그들대로 아웅다웅 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고, 나는 나의 할 일이 있을 터이니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교회 청년부 모임을 끝내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신촌의 ‘데모 대학’ 운동권 멤버중 2인자이며 같은 교회 청년부원이기도 했던 동년배 친구를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다소 상기된 표정의 그가 잰걸음으로 다가서더니 다짜고짜 “큰일났다”는 것이었다. 경찰의 수배를 피해 다니던 그는 “광주에서 끔찍한 대살육이 벌어져 2만 명도 넘게 죽었다”며 결사대를 조직해 광주로 가려 한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아무렴 대명천지에 2만 명이 죽었다는 건 뭐고 결사대는 또 뭐란 말인가. 당시 최고의 운동권 서적이었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교회 여자 청년들에게까지 나눠주며 선동을 일삼던 그였다. 나는 그의 ‘괴담’을 무시해 버리고는 불쾌한 감정을 안고 바삐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나는 당시 뜻이 맞는 몇몇 후배들과 막 관심을 끌기 시작했던 ‘평신도 각성’ 독서 모임을 열었고, 한편으로는 한반도 서남부 광주 해남 일대의 교회들을 대상으로한 ‘전도여행’을 하며 ‘평신도 연대’를 모색해 보기로 했다. 그 지난 겨울에 우리는 영성을 체험한다며 경기도의 한 기도원 눈밭에서 사나흘을 딩굴다 왔고, 간단한 취사 도구를 챙겨 삼각산 기도원에 들어가 밤새 기도하며 토론하다 오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5월 18일부터 열흘 동안 광주 일원에서 ‘연희동 아저씨들’에 의해 벌어진 ‘빨갱이 토벌 작전’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예 들어갈 수 없으니 전도 대상에 접근할 수도 없었고, 육체가 무참히 살육을 당했으니 구원받아야 할 영혼도 없어져 버린 현실 앞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한동안 우리는 극심한 아노미(정신적 정상성의 급격한 상실)에 빠져들었다.
 

▲ 망월동 5.18 묘역에 뭍혀 있는 민주 영령들. ⓒ 김명곤

미시간의 그 일요일

내가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고국을 떠나 푸른 꿈을 안고 유학길에 나선 후부터였다. 온통 ‘선진조국 건설’에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차압당한 채 살아왔던 전체주의적 분위기에 그런대로 적응하며 즐겁게 살아왔던 내게, 유학은 기존의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

분명히 기억컨데, 그날은 1987년 겨울 어느날 일요일 아침이었다. 교회에 함께가자며 학교 기혼자 아파트 맞은편에 살던 ‘광주 부부’ 집 방문을 두드리려다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문앞에 멈칫 서고 말았다. 안에서 두런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뭔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와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숨죽인채 듣다보니 누군가 기도를 하는 소리였다. 2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처절하기까지 한 기도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이고 아부지 하나님, 천하에 저런 나쁜 놈들을 가만 놔두시것습니까. 아이고 흑흑 아이고, 까치 새끼 같은 애를 매달아 질질 끌고가기까지 했어요. 아이고 전두환이 저런 찢어죽일 나쁜 놈을… 아이고 아부지 하나님, 흑흑 컥컥…”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다. 울분과 탄식과 원망의 외마디였다. 심장을 쥐어 짜는 듯한 탁한 목소리의 그 기도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 도망치듯 황망히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잔설이 쌓여있던 아파트 뒷켠의 긴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한참이나 몸을 식혀야 했다. 뭐랄까. 느닷없이 거대한 몸집의 누군가를 방금 마주쳤고, ‘이런 순 무식한 놈!’ 호령과 함께 눈에 불꽃이 튈 정도로 세게 따귀를 후려 맞은 느낌이었다. 이른바 누미노제 체험(거룩한 신존재에의 체험)이었다.

얼마후 우연한 자리에서 그 어른이 LA에서 방문한 가까운 친척으로 교회 장로라는 사실, 그리고 LA와 뉴욕, 캐나다 등지에 광주에서 피신해온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으나, 차마 가족 중 누가 광주에서 변을 당했는지는 묻지도 듣지도 못했다. 어찌어찌 해서 뭔가를 들었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쓰레기 통 속에서 발견한 ‘광주’
 

▲ 5.18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구성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내가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맞은 것은 박사과정을 위해 플로리다로 학교를 옮긴 1년 후인 1989년 5월 말 토요일 오후였다. 페이퍼와 페이퍼, 시험과 시험에 지쳐 있다 학기가 끝나 여유로운 낮잠에 빠져 있었다. 가깝게 지내던 교회 후배가 찾아와 ’00이 아빠가 공부 끝나고 급히 귀국하며 뒷처리를 부탁했다’며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졸지에 졸린 눈으로 그를 따라 나섰다.

그날 기혼자 유학생 빌리지 공동 쓰레기통에 동료 유학생이 남기고 간 옷가지와 변변치 않은 살림도구 등을 던져 넣다가 나는 일생일대의 ‘횡재’를 하게 되었다. 30년이 넘도록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횡재품은 다름 아닌 20여권의 소설과 비소설류 책들이었다.

그런데, 평소 말없이 먼 발치에서 목례를 하고 지나칠 정도의 친분 밖에 없던 귀국 유학생 친구가 놓고 간 책들 가운데 한 가운데가 쩍 쪼개져 실밥이 나풀거리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뭘까’ 펼쳐 본 책은 황석영이 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였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릴 뻔 했던 그 책은 여름 내내 나를 잠 못 이루게 하였다.

한 여름 이국땅 쓰레기 통에서 건져낸 광주의 실체는, 홍희담의 <깃발>에 이어 임철우의 <봄날>에 이르서는 더욱 촘촘하고 적나라하게 확인 되었고, 그때마다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이후로 보게된 몇편의 ‘광주 비디오’는 상상 속의 5.18에 색을 입히고 입체감을 더해 주었다.

5월에 5월을 거듭하며 광주의 진실이 역사의 앞 바다에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분명 소름돋게 하는 충격이었다. 운동권 친구가 허풍으로 말하던 ‘광주’는 2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느낄 만큼, “6•25때도 그런 장면은 보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올 만큼, 어느 시인이 읊었듯 ‘참새도 세상을 뜰 만큼’ 그렇게 참혹스런 사실이었다. 이후로 매년 5월 어간에 ‘새로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 마다 일어난 분노에 치를 떠는 일이 반복되곤 했다.
 

▲ 광주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멍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아이(조천호). 광주 상흔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눈망울이다. ⓒ 자료사진

불쾌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불편함으로

세월이 약이런가. 1990년대에 들어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훈장이 주모자 그룹의 정치권에 의해 수여되고, 6•29라는 고단수 묘약에 완전히 분노는 풀이 꺾이게 되었고, 88올림픽의 휘황한 팡파르 속에서, 그리고 천민 자본주의의 질탕한 단내음 속에서 급기야 ‘불편함’으로 전이되기에 이르렀다.

딴은, 지금도 광주는 여전히 불편한 존재일 터이다. 그러나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더욱 불편하게 다가오는 광주. 역사를 운행하는 조물주는 생략하거나 건너뛰기도 허용치 않고 꼬박꼬박 우리의 월력 속에 5•18을 챙겨넣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잊었는가 하면 다시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불쾌와 분노의 언저리를 맴돌게 하다 다시 불편하게 하는 광주.

뒤늦게 ‘역사’에 철이들어 알게된 사실은, 1980년 5월 18일을 관통해온 세대는 어떤 형태로든 광주 체험으로 인한 그 어떤 신드롬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5월이 되면 세상에 대한 것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밀려 들었고, 이에 더하여 갖가지 감정이 뒤섞이고 엉켜져서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뒤시끄런 감정이 되기 일쑤였다.

뒤시끄런 감정을 안은 채 광주를 너무 보고 싶었다. 미필적 고의로 인한 죄책 때문에 보고 싶었고, 사죄하는 공범자의 마음으로 보고 싶었고, 세월의 날 속에 무뎌질 것만 같은 양심을 곧추 세우기 위해서도 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20세기 분단 조국에 태어난 ‘나’라는 인간의 실존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역사의식의 청맹과니 상태를 벗어나게 해 주었고, 운명 공동체적 ‘구원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고마움 때문에 광주를 보고 싶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광주’는 더 이상 지명이 아니다. 광주는 한국인들의 무뎌진 양심에 날을 세우게한 암호다. 더하여, 진정으로 ‘구원’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우리시대의 암호다.

다시 고백컨데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의 진실이 하나 둘씩 벗겨지며, 오히려 광주가 나를 구원하기에 이른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광주’는 나뿐 아니라, 털끝만큼이라도 양심을 가진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세계에 이르게한 암호이며, 토마스 쿤이 말하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를 일으킨 일대 촉발제였다.

다시, 망월동에서

김포 공항을 떠난지 24년이 흐른 2012년 고국 땅의 2월은 매섭게 추웠고, 망월동에는 찬 바람만 쌩쌩 불고 있었다. 샛길로 빠졌다는 미안한 생각에 장모님께 먼저 소재를 알렸다가 괜한 오해를 샀다.

“어메 김 서방, 뭔 일로 망월동에 가 있능가? 어무이(어머니) 상 치르고 화장했다더니 망월동에 모셨는 갑네?”

호스피스 병동에 1년 반 동안을 누워 계시던 어머님은 내가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실눈으로 잠깐 올려다 본 후 1시간 만에 돌아가셨고, 상을 치르자 마자 KTX를 타고 망월동에 먼저 들렀던 터였다. 망월동에 먼저 간 사위를 어리둥절해 하시는 장모님께 얼버무리듯 말하고는 묘역을 빠짐없이 둘러 보며 늦게 철든 남자는 꺼억꺼억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7년이 흘렀고, 이번에는해외언론인 단체의 일원으로 묘지석 앞에 다시 섰다. 5.18 당시 사망한 영령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영령들, 민주화 운동 공로 영령들의 이름을 마음으로 조용 조용 부르다 보니 다시금 죄책감이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와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이들 중에는 생전에 만났던 이름들도 있고, 낮익은 이름들도 있다.

저수지에서 친구들과 멱감다 계엄군의 사격에 죽은 방광범(사망 당시 13세), 5•18 및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중단식으로 사망한 박관현, 도청 항쟁 지도부 정상용, 광주항쟁 유혈진압을 항의하며 투신한 김의기, 이성으로 우상을 타파하는데 일생을 바쳤던 리영희 교수, 거대한 민주화의 흐름에 의기 하나로 몸을 실은 무명의 열사들.

리영희 교수님의 묘비석 앞에 잠시 서서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다 보았다. 파안대소 하는 모습에 밑바닥으로부터 뭉클하는 어떤 것이 다시 목울대로 올라왔다. 늘 실증적인 글쓰기를 강조하셨던 교수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 ‘시대의 은사’ 리영희 교수의 묘비석 앞에서 한참 동안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김명곤

두 번 째 5.18 묘역을 방문하고 정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더 무거워지고 깊은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미완의 5.18’에 대한 역사적 무게가 다시금 어깨를 짓눌러 왔기 때문이었을 터이고, 광주가 가져다 준 구원을 완성해 낼 일이 그리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광주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학살의 원흉들은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이고 거리를 활보하며 호의호식하고 있다.

“역사의 우연은 과제를 안겨준다”고 했던가. 1980년 5월 어느날 우연히 만난 광주. 이제 ‘남은자’의 과제는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더불어 70여년 동안 한반도 땅에 온갖 갈등을 일으키며 삶의 정상성을 파괴해온 분단을 극복하여 평화통일을 이루는 일이라 믿는다. 빨갱이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광주학살은 독재와 분단상황이 가져온 비극이기 때문이다.

【한국(광주)=세언협공동취재단】 김명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