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속의 풍경
나희덕
미안합니다
무릉계에 가고 말았습니다
무릉 속의 폐허를,
사라진 이파리들을 보고 말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요
흙을 마악 뚫고 나온 눈동자가 나를 본 것은
겨울을 건너온 그 창끝에
나는 통증도 없이 눈멀었지요
그러나 미안합니다
봄에 갔던 길을 가을에 다시 가고 말았습니다
길의 그림자가, 그때는 잘 보이지 않던
흙 속의 풍경이 보였습니다
무디어진 시간 속에 깊이 처박힌 잎들은 말합니다
나를 밟고 가라, 밟고 가라고
내 눈은 깨어나 무거워진 잎들을 밟고 갑니다.
더이상 무겁지 않은 生, 차라리
다시 눈멀었더라면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비한 현호색은 진 지 오래고
그 괴경(塊莖) 속에 숨기고 있는 毒까지 다 보였습니다
그걸 캐다가 옮겨 심지는 않을 겁니다
미안합니다
무릉계에 가더라도 편지하지 마십시오
그 빛나던 이파리들은 이미 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봄에 갔던 길을 가을에 다시 간다. 그러나 시인의 눈이 멀도록 경탄을 자아냈던 무릉의 잎새들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시인은 담담하다 오히려 미안하다. 경의롭던 풍경의 본질을 이해하는 시어의 초연한 경지로 인해 독자는 그 깊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시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던 나희덕 시인의 말을 빌자면, 언제가 그 슬픔은 도도한 강을 이루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