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했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는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 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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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기다리는 것이 가버린 시간, 가버린 젊은 날인가 보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자. 사랑의 치열함에서 한 발 물러나 호수를 바라보며 그리움 하나 가슴에 두고 스스로 차고 깊어지는 거라고 하자. 이형기 시인은 ‘대한민국 문학상’, ‘윤동주 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2005년 2월 작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