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한때는 월북문인으로 분류되어 하마트면 영영 만날 수 없었을 뻔 한 정지용의 ‘향수’는 빼어난 그의 대표작이다. 한 폭의 그림속 고향 풍경을 떠올리며 또한 노래가 되어 우리 곁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요즘은 시절이 자꾸 하수상하여 혹여 다시 북쪽과 털끝만한 관련이라도 있으면 분서갱유라도 당하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이 들어 지면을 통해 도장 박아둘란다. 물론 기우이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