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초까지만 해도 아이스 스톰이 오고 대정전에 도시가 혼란스러워 마음도 뒤숭숭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이 녹고 그 사이에 봄이 왔다. 아주 성큼 큰 걸음으로.
캐나다에 와서 처음 2년 동안의 랜트 기간을 빼고 11년 가까이 자가에 살았지만 10년 새 3번이나 이사했다. 몬트리올 다운타운 쪽 아파트를 렌트해 살다 처음 주택을 장만한 이유는 첫아이 때문이었다. 아니 생후 6개월 무렵부터 열심히 아파트 거실을 기어다니던 첫아이의 모습을 본 남편의 말 때문이었다. “우리 아기가 이렇게 열심히 기어다니다 이제 곧 걷고 뛸 텐데, 마당 있는 주택이 더 좋을 것 같아!” 이 한마디에 거의 반사적으로 “그래! 그렇게 하자!”라고 대답했다. 갓 캐나다로 이주해 왔을 땐 무조건 다운타운에 살아야만 내가 이민자로서 잘 적응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의 결혼식 후,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입국하기로 한 나 없이 남편 혼자 신혼집을 구했다. 첫 아파트는 바로 길 건너에 한국 식료품 마켓이 있는 곳이었고, 두 번째 아파트는 도보 5분 이내에 몬트리올 다운타운 접근과 버스로 몇 정거장이면 한국 식료품 마켓도 갈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다. 신혼생활을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던 랜드마크를 포기하고 몬트리올에 온 지 2년 만에 다운타운을 떠났다. 그때는 웨스트 아일랜드 생활이 이리 길어질 줄 예상치 못했다.
아기가 태어나며 꿈꾸고 그려왔던 자유여행자로서의 캐나다 이민생활에 반전이 찾아왔다. 주머니 사정의 현실에 따라 주택을 구입하여 몬트리올 외곽으로 나오게 되면서 도보나 버스 이용 대신 직접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정말 위대하구나 느낀 건 내가 운전대를 잡으면서다. 아이를 데리고 피치 못하게 가야 할 곳이 생기니 생명을 건 도전도 하게 되었다. 2011년 한국에서 캐나다로 출국하기 하루 전, 기적적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온 세상 겁보 중의 겁보인 내가 운전이라니. 영어는 아주 조금 하지만 불어는 전혀 못해도 무리 없이 지낼 수 있던 몬트리올 시내 중심가에서의 생활이 즐거웠다. 막상 외곽 지역으로 나오니 타국의 언어가 서툰 주부이자 아이 엄마로서 현실이 바로 느껴졌다. 그렇지만 마음껏 뛰어놀며 커가는 아이를 보며 앞뒷 마당이 있는 넓고 큰 집으로 온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다.
하나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일과 관리가 끝없는 주택 생활을 몇 년 동안 해 보니 삶의 주체가 가족인지 집인지 햇갈리며 내적 갈등이 극에 달했다. 몇 개월의 대화 끝에 남편이 나의 이사 제안을 받아주어 우리는 첫 주택 근처에 신축한 콘도로 거처를 옮겼다. 거의 6만 불 가까이 들여 레노베이션을 마친 집에서 한 1년 정도 살고 난 후였다. 레노베이션 때문에 주택을 팔아도 손에 남는 건 거의 없었지만 건물 관리에 신경 쓸 일이 적어 상대적으로 편안한 콘도가 당시엔 절실했다. 그곳에서 평생 해로하자고 남편을 설득, 정말 천신만고 끝에 이사한 방 2칸짜리 마당 없는 집이었다. 너무나 편리한 콘도에서의 생활이 주부로서는 좋았고 엄마로서는 미안했다. 다행히 둘째 아이가 데이케어를 가기 얼마 전, 콘도 바로 건너편에 신축한 영어 불어 혼용 어린이집이 개원했다. 나와 둘째 아이를 위한 최적의 장소에 위치한 콘도라 남편도 점점 그곳의 이점을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솔직히 남편은 콘도살이를 반대했다기보다는 4년 만에 집을 파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여전히 주택에 살기를 바라는 남편의 마음을 신이 알아챈 걸까 싶게 2년 뒤 희소식이 찾아왔다.
남편과 연애 때 계획은 했지만 내가 정말 다둥이 엄마가 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정말 주거지를 바꿀 때마다 아이도 태어났다. 퀘백주의 육아휴직 제도에 힘입어 그리고 조카들을 돌보며 단련한 남편의 남다른 육아 스킬에 넘어가 그런지 우리는 정말 주거지를 바꿀 때마다 아이도 태어났다. 첫 주택에서 둘째가 태어났는데 콘도에서 셋째가 태어나고 넷째도 임신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콘도에서 트리플 침대까지 놓으며 살다가 도저히 안 되겠기에 다시 주택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남편은 반색하면서도 또 이사하면 이번엔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그 집에 살자는 전제를 내세웠다. 집값 상승으로 인한 시세 차익을 염두에 두고 집을 사서 보통은 10년 이상 거주한다는 캐나다인들. 남편이 캐나다와 한국의 집값 상승률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한국처럼 자주 이사해서는 안 된다며 나를 설득했다. 그렇게 결혼 13년 차가 다가오는 지금 우리는 캐나다에서의 다섯 번째 집에 살고 있다. 팬데믹 속에 태어난 막내는 겨울 사이 세 살이 지나 가을이면 데이케어에 간다. 여섯 식구가 완전체인 우리 가족에게는 콘도보다는 주택살이가 맞는다.
말괄량이 네 딸들이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다. 결혼 전까지 한국에서 아파트에 살다 온 나는 적당히 제단 된 편리함이 있는 콘도 생활이 아직도 가끔 그립다. 며칠 전 여름 날씨처럼 반짝 햇볕이 좋았던 날, 가볍게 아이들의 옷 정리로 시작해 화분 정리에 나섰다. 신발 정리까지만 하자 싶었는데 봄맞이 대청소가 되더니 거실 가구들을 재배치하기에 이르렀다. 봄맞이란 이유로 하루 종일 집 안팎을 치우고 정리하며 단장하던 나는 “이사는 이제 안 된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아이들이 다 잠들고 난 뒤에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라디오를 듣는 나는 밤에 가구를 옮기기도 한다. 한국인을 거의 못 만나는 지역에 살면서 외로움을 키워간 게 이사에 대한 마음으로 나올 때마다 밤 취미로 가구 자리를 바꾼다.
이사 철인 한국과 같이 봄이 왔으니 이제 매물들이 조금씩 더 나올 것이다. 다수의 언론에 따르면 캐나다 집값이 내년엔 주춤할 거라고 한다. 팬데믹의 버블이 아마도 점점 가라앉을 건가 보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이고 물 건너간 이사다. 이따금 캐나다 리얼터 사이트는 보지만 이미 최소 이사 횟수를 초과했기 때문에 양심상 차마 이사 얘기는 더 이상 못 할 것 같다. ‘매주 새봄이 온 것처럼 주맞이 청소를 충실히 하고 계절에 따라 가구 위치를 바꿔 보는 걸로 이사를 대체하자’고 다짐하며 봄맞이 청소를 끝냈다. 몸은 힘들지만 집 안팎을 개운히 시원케 하는 대청소의 날이 오니 겨우내 움츠러든 마음에도 생기가 돈다.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도 경쾌하게 들린다. 봄아, 어서 오렴! 정말 반갑구나!
민소하
한국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신문기자로 활동하다.
2011년 몬트리올로 이주, 네 아이들을 키우며 틈틈이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카카오톡 soha8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