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달

이운진

기억을 허문다

내가 온갖 죄를 지은 저 아름다운 시절과
돌림병같던 청춘을 헐어서
기억으로도 돌아갈 곳이 없어졌으면 하고

어느 날 내가
당신을 처음 알던 백일홍 나무 아래 서 있을 때
갓 핀 꽃송이가 먼저 알고 반겨도
나는 처음인 듯 슬펐으면

가장 어두운 눈 속에서
가장 밝은 당신이 사라질 때
한 날에서 다른 날로 옮겨가 듯
무심히 아팠으면

얼굴이 없는 나를 만났을 때도
밤보다 깊은 문장을 잃었을 때도
눈만 가만히 감았다 뜬 채,

지나간 시간을 허무는
그런 밤에는
눈물이 울다 간 자리에

파란 달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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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듯 지나갔으면 해도 젊은날은 열병이다. 그 끓는 꼭지점 위에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시인의 아픈 날들을 이 시에서 본다. 눈물 자국이 남긴 파란 달은 한 줄 문장이 된다. 지나간 시간을 허물고 밤보다 깊은 문장이 되었을까.

이운진 시인은 ‘시문학’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