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그리운 102

원재훈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 꼭 시간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자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리다보면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내 어깨에 기대는 따뜻한 습기

내 가슴을 적시는 그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의 끝 매달린 한 장의 나뭇잎이 된다

거기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기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지는

내가, 내 삶에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 줄 몰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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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처럼 핸드폰이 사용되기 전, 102란 번호가 말해주듯이 삐삐를 사용하던 시절의 약속이란 한없이 떨어지고 있는 나뭇잎 같은 것이었을까.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기다리고 더 많이 작아지고 그래서 어쩌면 기다리는 장소에서 빗방울 하나로 사라져버리고 싶었을 때는 없었을까. 그리운 사람 하나 가슴에 품고 사는 일은 이렇게 타인의 장소에 나를 가두고 오래도록 기다리는 일이었을까 원재훈 시인은 1989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낙타의 사랑’, ‘그리운 102’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