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네가 나를 슬몃 바라보자
나는 떨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어린 연두 물빛이 네 마음의 가녘에서
숨을 가두며 살랑거린 지도
오래된 일
봄저녁 어두컴컴해서
주소 없는 꽃엽서들은 가버리고
벗 없이 마신 술은
눈썹에 든 애먼 꽃술에 어려
네 눈이 바라보던
내 눈의 뿌연 거울은
하냥 먼 너머로 사라졌네
눈동자의 시절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
그리고 오래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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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오래 그리워하고, 멀리서 바라보고, 말도 못하고 아파하는 사람은 봄날이 지독하다. 허수경 시인이 살아있을 때는 적어도 그 지독한 봄날도 그런대로 물이오르고 꽃술도 어렸겠지… 애비 없는 아이를 혼자 키우며 시를 쓸 때 마치 깨진 유리 파편에 손을 베인 것처럼 피를 흘리는 단어들을 울며 불며 조각 맞추듯 써내려간 시인. 독자는 이것이 오래된 일이라고 불러줘여할까. 허수경 시인은 이 시가 있는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낸 후 독일로 건너갔다. 그리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