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사과
나희덕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 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까만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흝어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지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누군가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이제 나희덕 시인도 지난날들을 돌아보는 나이가 되었나보다. 한 편의 영상처럼 그리운 날들, 아팠던 기억들을 떠올리는 저녁이었다고 하자. 야생사과 처럼 달고 시고 쓰디쓰던 젊은날…한 입 사과를 베어물었을 때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 과자를 차와 함께 먹던 때처럼 ‘잃어버린 시간’이 문득 찾아왔다고 하자. 나희덕 시인은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