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림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순환선 열차에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 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 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 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 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 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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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로 다들 무너져가던 1999년 여림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이 시로 당선된다. 그리고 십 여 년이 지나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이란 시집이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미 시인은 이 세상 사람이아니다. 사람들은 2002년에 그가 죽었는지도 모르다가 1년 만에 지인들이 모여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를 낸지 13년 만의 일이다. 시인은 지금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가… 신춘문예에 당선 된지 3년 만에 작고한 시인은 1967년 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