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대하여
나희덕
서랍을 열고 나면
무엇을 찾으려 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서랍을 닫고 나면
서랍 안에 무엇이 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서랍은 하나의 담이다
감싸고 품어내는 것, 그보다
더 넓은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그리움은
서랍 안에 저녁햇살처럼 누워 있고
그 그늘 속에 누추한 벌레 몇 마리
어떻게 잠이 드는지 볼 수조차 없다
사람이 입을 내밀고 웃고 있을 때
닳고 닳은 입술 사이로
무슨 말인가 건네려 할 때
나는 담을 넘듯이
영혼의 서랍을 열어본다
서랍은 시인에게 영혼의 집인가 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이렇게도 표현하는구나… 영혼이 없는 관계 또는 영혼을 찢는 관계… 나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인가 건넨다는 것, 상처가 되지 않고 시가 되기를 바란다.
나희덕 시인은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 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