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정호승
해뜨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새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갑니다
누님같은 소나무가 빙그레 웃는
새해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맑은 연꽃대에 앉은 햇살 하나가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당신의 창을 두드리고
아무도 닦아주지 않는 당신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사랑하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다시 길을 가게 합니다
어두운 골목
무서운 쓰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이제 더 이상 당신 혼자 떨지 않게 합니다
쓸쓸히 세상을 산책하고 돌아와 신발을 벗고
이제 더 이상 당신 홀로 밥을 먹지 않게 합니다
밝음의 어둠과
깨끗함의 더러움과
배부름의 배고픔과
편안함의 괴로움을 스스로 알게 합니다
때로는 마음의 장독대 위에 함박눈으로 내려
당신을 낮춤으로써 더욱 낮아지게 하고
당신을 낮아지게 함으로써 더욱 고요하게 합니다
당신이 아직 잠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무와 숲을 구분하지 못하고
바람과 바람소리를 구분하지 못할지라도
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천개의 차가운 강물에 물결지며 속삭입니다
돈을 낙엽처럼 보라고
밥을 적게 먹고 잠을 적게 자라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살아있다고
두꺼운 검은테 안경을 낀 날카로운 인상의 정호승 시인의 젊은 날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를 좋아하던 독자들이라면 이제 이 시인도 60이 넘었다는 사실에 적응이 안될지도 모르겠다. 연륜 만큼이나 시는 자꾸 더 따뜻해지고 마음이 추운 독자들은 이 시의 품에 잠시 자신을 내려놓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