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거리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 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디를 못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서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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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으면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이 생각한다. 고정희 시인의 연배가 높으니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에 대한 답시가 된 것 같다. 1970~80 년대 한국의 험하고 어두운 길을 묵묵히 지나며 그 어두움이 끝내 희망의 손을 놓지 않기를 세상에 전하던 고정희 시인 대신 이제 우리에게는 그의 시만으로 내가 지나는 세상의 성격을 파악해보아야 한다.